가을밤 그리움
가을밤 그리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1.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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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누군가를 절실히 기다려 본 사람은 가을밤이 얼마나 길고 긴지를 안다.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들이닥칠지를 몰라서 일부러 잠을 자지 않는 의미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들지 않는 경우이다. 그래서 잠 못 이루고 밤을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밤의 정경들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오고 그 정경들이 또 다른 그리움을 자아내도록 하기도 한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가을 밤,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잠 못 들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 차가운 방에서(寒閨怨) 

寒月沈沈洞房靜(한월침침동방정) : 차가운 달빛에 밤은 깊어 방은 고요한데 

眞珠簾外梧桐影(진주렴외오동영) : 진주 구슬주렴 밖으로 오동나무 그림자 진다. 

秋霜欲下手先知(추상욕하수선지) : 가을 서리 내리려하니 손끝이 먼저 알아 

燈底裁縫剪刀冷(등저재봉전도냉) : 등잔 아래 재봉하는데 가위가 차갑기만 하여라.

※ 쌀쌀한 가을이 되니 달빛마저도 차갑게 느껴진다. 이 차가운 달을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 달빛에는 따스함 보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달과 함께 밤은 깊어만 가는데 시의 주인공인 아낙은 잠 못 들고 있다. 안 들었다기보다는 못 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낙이 기거하는 집안 깊숙한 곳의 방(洞房)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응당 있어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달빛의 차가움과 함께 방안의 적막함은 아낙으로 하여금 더욱 외로움을 느끼도록 만든다. 아낙의 방엔 아직 침구가 깔려있지 않다. 대낮에 드리워 놓았던, 진주로 장식한 주렴을 그대로 내려뜨린 채 밖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남편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주로 주렴을 장식했다는 것은 시의 주인공인 아낙이 아직도 신혼 상태임을 암시한다. 주렴 밖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이 그림자는 실망스럽게도 남편이 아니라 오동나무였다. 이 오동나무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이기도 하다. 차가운 달, 깊은 밤, 고요한 방, 진주 주렴, 오동나무, 이것들은 가을밤 외로움에 떠는 젊은 새댁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시인이 치밀하게 계산하고 배치한 시어들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옷감을 잘라내는 가위의 차가움이 손끝에 느껴지자 아낙은 밖에 서리가 내렸음을 직감적으로 안다. 밤새워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침침한 등잔불 밑에서 남편이 돌아와 입을 옷을 만드는 아낙의 모습 속에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애틋한 그리움의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일지도 모른다. 부쩍 길어진 가을밤을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며 그 사람을 위해 옷을 지으며 하얗게 새우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고결한가? 지극정성으로 기다리는 마음이 변치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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