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면 족한 것을
사랑이면 족한 것을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11.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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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비에 젖은 잎들이 곱다. 뜨거운 이별잔치다. 바람에 구르는 나뭇잎도 말을 걸어오고 낙엽 더미 속 몰래 피는 민들레도 스승이 되는 시간. 풍성한 결실을 남긴 채 한바탕 휘모리장단으로 불사르던 늦가을이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이맘때면 어쩌지 못하는 가슴이 앓는 소리를 낸다. 

사무치게 그리운 이들의 기억으로 따뜻하면서도 아프고, 연례행사처럼 내가 살아낸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려놓을 것과 갚아야 할 고마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올가을엔 유난히 선물이 많다. 땀 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염치없이 받아 놓은 결실들로 주방은 곳간이 되었다. 호박죽 좋아한다고 챙겨주신 늙은 호박들, 건강을 염려해 무공해라는 꼬리표를 들고 들어온 대추며 감, 고구마, 마늘. 그리고 수많은 약재들. 눈물이 날 것 같다.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각각인 이 사랑들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리라.

문득 식탁 한구석에 며칠째 놓여있는 잣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주워온 잣 한줌. 통통한 놈으로 골라 딱딱한 껍질을 칼등으로 톡톡 두드려 알맹이를 뺀다.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알맹이가 깨졌다. 부스러진 하얀 속살을 입에 넣으니 잣내음이 향긋하게 번지며 고소하다. 이번엔 작고 길쭉하게 생긴 볼품없는 놈을 힘껏 내리쳤다. 생김새로 봐선 쭉정이려니 힘 조절을 안했는데 꽉 찬 속이 껍질과 함께 으스러진다. 조심하지 않은 덕에 껍질을 발라내고 먹느라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 살살 기대감이 생긴다. 조심조심 크고 볼록하니 배가 나온 잣을 골라 살짝 두들긴다. 껍질이 폭삭 내려앉는다. 쭉정이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막상 속은 빈 껍질이다. 헛웃음이 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듯 화끈하다.

며칠 전 읽었던 수필집이 떠오르며 작가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충청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구사하는 농부의 일기는 진솔하면서도 따뜻하고 정겨웠다. 맑은 도랑물처럼 졸졸 흐르는 삶속엔 고단한 농군의 고민도 있지만 세상을 사랑으로 포용하고 살아온 아름다운 무늬들로 가득했다. 알맹이 꽉 찬 삶이 거기 있었다.

문장의 멋을 따지고 편집 디자인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참으로 헛되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 한답시고 고전(古典)에 고전(苦戰)하는 내 삶이 빈껍데기를 닮았다. 삶으로 배들지 못하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그럴듯한 철학자들의 이름을 내세워 본들 혼자 주고받는 메아리일 뿐. 

요즘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삶에 대한 고민들이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상업적으로 변질된 흐름에 섞여 겉무늬만 요란한 지적 유희는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껍질을 쓸어 담으며 무늬만이라도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내게 한마디 던져본다. 

‘그저 사랑이면 족한 것을 세상 어렵게 산다.’ 

읽던 책 덮어두고 단풍구경이나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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