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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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10.2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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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조교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다. 내 방의 찻잔이 깨졌다는 전갈이었다. 장학금을 주기 위해 방에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청소하는 신입생이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깼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더니, “모두”라고 했다. 하!

차를 즐기는 내방에는 찻잔이 많다. 우리나라에 없는 그릇도 꽤 있다. 한국식 차구도 있지만, 모두 용도가 있다. 특히 대만에서 사온 적당한 크기의 주전자를 나는 좋아한다. 일본산 망이 달린 차호도 차의 종류에 따라 쓸모가 많다. 아무래도 찻물에 찻가루가 떠있으면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지저분해 보인다. 그릇도 차의 종류나 그때 기분에 따라 선택을 한다. 많이 마시고 싶을 때도 있지만, 진하게 한 잔 마시고 싶을 때도 있다. 색이 보고 싶을 때도 있고, 향이 그리울 때도 있다.

손님도 한 분이 올 때 모실 찻잔이 있고, 네다섯이 함께 즐길 차구가 있다. 더울 때 먹는 차, 추울 때 먹는 차에 따라서 잔이 달라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배부를 때는 큰 찻잔이 부담스럽고, 배고플 때는 진한 차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차구를 갖추게 된다. 

찻잔을 오래 쓰다 보면 찻때(차구茶垢: 차구茶具와 다르다)가 낀다. 그때 융단으로 잘 닦으면 윤이 나는데, 이것을 차를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연륜을 보이는 것이라서 애지중지한다. 마치 우리나라 찻잔에 유약이 갈라진 틈새로 찻물이 스며들어 하얀 백자가 나무색을 띄는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새댁이 중국식 차구에 미친 사람에게 시집을 와서는 지저분하다고 박박 때를 닦아버려 이혼할 뻔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유학시절의 기억이다. 우리나라의 외국사찰인 홍법원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다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차구 이야기가 나왔다. 스님이 아끼던 찻잔을 시종이 와장창 해버려, 화를 참지 못하고 차구를 올려놓는 차반으로 머리를 깠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스님은 나름 차구애호가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는데, 내가 듣기로는, 모든 것 다 버린 스님께서 물욕에 평정심을 놓친 것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결심했다. 차구를 아끼지 않겠다고. 비우는 마음을 위해서라도 그깟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겠다고. 그 경험이 커서 그런지, 찻잔을 깼다는 소식에도 ‘잘했다’고 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깨진 김에 찻잔 정리하지, 뭐. 자빠진 김에 쉬어가지, 뭐.

왜 그런지 청소하는 학생은 찻잔 깨진 것을 모두 모아두었는데 그 양이 상당했다. 아마도 허락을 받지 않고 버리기가 뭐했던 모양이다. 일주일 후에 온 그 학생에게 물었다. 저 정도면 사람도 다치겠는데 괜찮냐고. 들고나가다가 발이 꼬여 넘어졌던 모양이다.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마음이 놓였다. 

놀라지 않았냐고 거듭 물었고, 괜찮다는 대답에 나도 위로를 해야 해서, 그렇다면 오늘은 청소하지 말고 쉬라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잘못한 것 같다. 

학생은 마치 ‘너는 칼 손이니 청소도 하지 마라’, 또는 ‘하루 동안 반성할 기회를 줄 테니 조심해라’로 들릴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그냥 청소를 시키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한 위로에 마음이 상하지 않았나 걱정된다. 이래도 저래도 학생 앞에서 선생은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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