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4.10.2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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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사랑과 평등, 평화, 행복은 듣기만 해도 좋은 말이다. 동서고금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를 싫어할 자 아무도 없다. 사랑과 행복이 개인지향이라 각자 마음먹기에 달려있지만 평등과 평화는 사회지향이라 개인의 의지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인류의 난제 중에 난제다. 그러므로 사랑과 평등, 평화, 행복은 인류의 영원한 로망이며 핵심가치이다. 

이 중에서 ‘평화’를 먼저 쓰는 까닭은 독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다.

가톨릭 성당에 가면 미사 중에 신자들끼리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주재자 신부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한다. 그런 후 양 옆과 앞뒤 좌석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며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라고 정겹게 인사를 나눈다. 잘 아는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모두 그렇게 인사를 한다.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 행한 여러 전례에서 이렇게 인사하는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수차례 보도된바 있어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모습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평화를 빕니다’라고 희원했건만 세상은 여전히 혼돈에 휩싸여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선 나라 간·민족 간· 종교 간에 참혹한 살생과 파괴가 자행되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고 테러와 불의의 사고로 무고한 생명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가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며 세계 12대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도 북한의 핵위협과 크고 작은 도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얼음판 같은 평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국민들은 북한을 통치하는 젊은 세습 3세 통치자의 볼모가 되어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 곡예하 듯 불안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사계절 으르렁거리고 있고, 강자는 약자를 힘으로 누르고, 부자는 빈자를 돈으로 지배하고, 지식인은 배우지 못한 자를 업신여기고, 지역 간·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과 반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도무지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평화는 사치스러운 말의 성찬일 뿐이다. 세상은 평화로 잘 포장되어 있으나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불안과 부조화로 얼룩져있다.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과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이다. 유의어로 안전, 평온, 안온 등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평화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평화는 지키는 것이고 평화는 쟁취하는 것이다. 당연히 평화는 지킬 수 있는 힘에서 오며 나라의 평화도 튼튼한 국력에서 온다. 지킬 힘이 없는 나라와 국민은 평화를 향유할 수 없다. 

외국의 역사를 들추지 않더라도 수많은 외침을 당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수난사를 더듬어보면 안다. 그러므로 부국강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가족의 평화와 조직과 사회의 평화는 구성원들이 의무와 책임을 공유하고 지킬 때 생성되고 유지된다. 의무와 책임을 방기하고 권리와 편익만 쫓으면 아무리 견고한 평화의 성이라 할지라도 쉬 금이 가고 무너진다. 

공동체에 의무와 책임의 룰이 지켜지고 사랑이란 무기가 탑재되어 있으면 평화는 철옹성이 된다. 아무도 그 평화를 넘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각자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한량없는 사랑을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한다.

오늘도 세상을 향해, 그대를 위해, 두 손 모아 간절한 평화의 인사를 올린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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