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누대에 올라
높이 누대에 올라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0.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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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뭐니뭐니해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서리가 내리고, 기러기가 하늘을 날으면, 사람들은 사무치게 고향 가족 친구가 그리워진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산이나 언덕 같은 높은 곳을 찾곤 하는데, 이것은 조금이라도 먼 데를 내다보며 그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는 평생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가 가을에 느낀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높은 곳에 올라(登高)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바람은 빠르고 하늘은 높아 원숭이 휘파람소리 애달픈데
渚淸沙白鳥飛回.(저청사백조비회). 물가는 맑고 모래는 하얗고 새는 날아 돌아오네
無邊落木蕭蕭下,(무변낙목소소하), 보이는 곳마다 나무에선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부진장강곤곤내). 다함이 없이 흐르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가네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만 리 먼 곳 서글픈 가을에 항상 나그네 되어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태). 한평생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르네
艱難苦恨繁霜鬢 ,(간난고한번상빈), 어려움과 고통에 귀밑머리 다 희어지고
潦倒新停濁酒杯.(요도신정탁주배). 늙고 쇠약한 몸이라 새로이 탁주마저 끊어야한다네

※ 가을이 되자, 고향 그리움을 참을 수 없던 시인은 사는 곳 근처의 높은 곳에 위치한 누대에 올랐다. 한 발치라도 멀리 볼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욱 빨라지고 하늘은 더욱 높아 보이는데, 어디선가 원숭이 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맑은 강 가장자리와 하얀 모래, 그리고 둥지로 날아 돌아가는 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끝없이 눈 닿는 곳이면 어디서든 쓸쓸히 떨어지는 나뭇잎과 그칠 줄 모르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장강(長江)은 시인으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돌이켜 보면, 시인은 늘 만리(萬里)나 떨어진 낯선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였다. 또한 한 평생 내내 병마에 시달리며 홀로 누대에 오르는 신세였다. 외롭고 힘든 생활에 지쳐있던 시인에게 가을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었던 것이다. 그간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과 마음의 회한으로 인해 시인의 귀밑머리는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세어 버렸다. 여기서 서리는 단순히 시인의 머리가 센 것만을 비유하지 않는다. 가을 들판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는 시인에게 닥친 온갖 시련인 것이고, 서리를 맞아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풀들은 바로 시인 자신인 것이다.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시인에게 가장 안타가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평생 친구로 지냈던 술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다. 

타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늙고 병든 사람은 가을이 되면 혹독한 향수병을 앓게 마련이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고, 들판에 하얗게 앉은 서리를 보면, 자신의 기구한 신세가 떠오르기도 한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면, 높은 것에 올라 그리운 곳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는 것도 좋다. 세월에 순응하며 시들어가는 초목들을 보고, 늙고 쇠약해가는 삶의 숙명을 깨닫는 것도 또한 나쁘지 않다.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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