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조연들
숨겨진 조연들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10.2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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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올해도 한 달하고 조금 남았다.

벌써 추위가 오니 들꽃들도 황량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이른 봄 예쁘고 앙증맞은 새싹부터 가을 해국과 용담꽃까지 피고 졌다. 여름내 풀과 씨름했던 고달픈 시간이었지만 보람된 일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인들이 들꽃을 보러 와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에 실망하였을 것 같기도 하지만 풀과 씨름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차 한 잔 같이 마셔주는 여유를 보여준 이들도 있고, 들꽃이 좋아서 영상에 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주연인 들꽃을 빛내준 얼굴들이 있다.

새벽부터 물레나물의 환상적인 꽃술을 즐겨찾는 꽃등에, 저녁새참 들꽃 밭을 선회하며 군무를 보여주는 잠자리떼, 배가 아픈지 냉초를 즐겨 찾는 배추흰나비, 어스름 저녁에 용담의 꽃을 찾아오는 박각시는 물론 작은 무당벌레에서 메뚜기와 항가치까지 계절과 시간별로 들꽃을 찾아주는 조연들이다.

들꽃의 키가 너무 자랄까 거름도 주지 않았고, 벌레를 잡으려 농약을 치지도 않았으니 곤충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 이었을 게다.

벌과 나비는 꽃잎에 앉아 꿀주머니를 뒤지고 박각시는 긴 주둥이를 꽃잎 깊숙이 꽂아 넣고 멋진 비행솜씨를 뽐내며 식사를 한다. 사마귀는 들꽃의 그늘에 숨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나비와 잠자리들을 기다린다. 어둠을 즐기고 식사는 주로 밤참으로 해결한다. 들꽃들은 이렇듯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겨우 풀 뽑아 주는 일도 힘들어 했으니 들꽃 위를 누비는 꽃등에만한 역할도 못한 것 같다. 잡풀 뽑는 일이 어찌 꽃들의 내일을 만들어가는 중한 역할과 비교될 수 있겠나. 게으른 탓에 소독약도 비료도 주지 않아 곤충들에게는 좋은 친구였던 것 같다.

며칠 전 지인을 통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독지가를 만났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생활비와 수업료 같은 것을 지원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첫인상은 6초면 파악된다는데 나는 자꾸만 쳐다보았다. 머리는 길고 나이는 나보다 위일 것 같고 가냘프고 옷매무새는 좀 야했다. 나에게는 독지가란 이미지가 얼른 와 닿지 않았다.

의심 속에서 지켜보는데 내 선입견이 무척 미안할 정도로 학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에서 강한 힘을 느꼈다. 뜻있는 일에 마음을 쓰고자하는 에너지 같았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 학생들 말고도 여러 명의 학생들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아직 산국과 단풍진 낙엽이 들꽃 행세를 하고 있다. 무시로 얼굴을 내밀던 들꽃들이 주연이니 산국과 단풍도 당연 주연이 맞다. 노란 산국을 찾아 조연인 벌들이 잔치를 벌인다.

자칫 정적으로 보이기 쉬운 들꽃 밭의 풍경을 곤충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서울에 사는 정도만 알고 성도 이름도 전화번호도 그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이 여인의 겸손함이 철저히 숨겨진 조연 같아서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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