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인생을 만나다
길 위에서 인생을 만나다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4.10.21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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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프리랜서 기자>

길을 나선지 20일째입니다. 진도대교를 눈앞에 두고 가을비에 발이 묶였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면서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로 큰 길만을 골라서 다닌 것 같습니다. 길을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길의 미덕은 넓음과 빠름이었습니다. 

그 큰 길에서는 차들이 무섭게 달립니다. 다른 차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손해라도 보는 것처럼 경쟁하듯 내 달립니다. 짐을 가득 실은 대형트럭도, 닭장을 높이 쌓은 양계장 트럭도, 어린이집 승합차도, 초보딱지를 붙인 소형차도, 사장님을 태운 멋진 승용차도 모두 모두 달립니다.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닌데도 보따리를 들고 조심스레 갓길을 걷는 아주머니나 자전거를 탄 농부아저씨나 가방을 메고 걷는 학생이나 우체부아저씨의 오토바이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입니다. 

좁은 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없어 내달리기 편한데도 일단 차들의 속도는 줄어듭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멀리 피해줍니다. 길이 좁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경쟁상대가 없으니 자연히 속도가 줄어들고 경치를 보면서 즐기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런 좁고 한적한 길을 찾아 걸으면서 혹시 우리는 아이들을 모두 큰 길로만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부도, 학교도, 부모도 그 길만이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아이들을 큰 길로 몰아 앞만 보고 달리게 재촉 합니다. 함께 달리는 옆의 친구는 단지 이겨내야 하는 경쟁상대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 중심의 생각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좁은 길에서는 경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옆 사람은 보살핌의 대상이 됩니다. 서로 협력하는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깨우친 것은 경쟁이 없는 좁은 길에 깃들어진 생명입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길은 우리에게 무한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큰 길과 만나게 됩니다. 아등바등 큰 길을 달린 차들과 큰 차이 없이 같은 길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좁은 지방도로를 걷던 어느 날, 백 미터쯤 떨어진 동네 한복판에서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팔순잔치라고 합니다. 시골동네이기에 가능한 잔치소리를 들으면서 50여 년 전 외갓집에서 보았던 어느 할아버지의 환갑잔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잔치 3일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돼지를 잡는다, 전을 부친다 하면서 잔치준비에 동네가 들썩였습니다. 돼지를 잡고나자 한 아저씨가 오줌주머니에 바람을 넣어 꼬마들끼리 공차기를 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잔칫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흥겹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파할 즈음엔 남은 음식을 싸서 동네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습니다. 특히 할머니께서는 형편이 어렵거나 식구가 많은 집에 고기와 음식을 더 챙겨 주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환갑은 장수의 상징이었고, 환갑을 맞은 노인은 동네의 어른이었습니다. 물론 오래 살았다고 모두 존경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려 자신의 것을 베풀 줄 알았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냉철한 판단력으로 꾸짖을 줄 아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끼리 시빗거리가 생기면 모두 할아버지에게 달려갔고 그 어른의 말씀으로 모든 시비는 종결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어른이 없다고 개탄합니다. 옛날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훨씬 많고, 부자와 권세 높은 사람도 많아졌는데 어른이 없다는 것은 베풀 줄 모르고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않은 행동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가만히 나를 돌아봅니다. 나이 육십에 나는 어른일까? 항산(恒産)도 인품(人品)도 정직(正直)함도 갖추지 못한 나 자신에겐 이런 질문조차도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맞는 생일 아침,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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