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향기
가을의 향기
  • 충청타임즈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4.10.2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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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가을이다. 황금들녘의 아름다움에 빠져 목적지 없는 운전을 한다. 황금들판과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뽐내고 있는 가을 산, 그리고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기에 두 눈에 넣어 두고 싶다. 차를 멈춘다. 문화예술회관에 영화 펼침막이 높이 걸려 펄럭인다. 그 펄럭임조차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예술회관으로 들어간다. “애들아 너희들 저 영화 보러 가는 거니.” “영화요, 아니요. 우리는 학교 축제 때문에 가는 거예요” 한다.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이것 또한 내 관점에서 생각했던 거였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영화는 한달에 한 번씩 학교에서 관람하는 단체영화였다. 그 영화 관람은 공부에서 해방되어 맘껏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트레스 해소의 통로였다. 거기에다가 우리학교 뿐 아니라 타 학교 학생들과 같이 관람했다. 가끔은 근처의 남학교 학생들과 같이 보고는 했는데 여학생들은 아래층에서, 남자 학생들은 2층에서 주로 봤다. 평소 함께 할 수 없는 학생들이 모이니 다들 들떠 술렁거렸고 영화 중간 중간에 2층 남학생들의 추임새도 한몫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선생님들은 우리가 남학생과 섞일까 염려해 일렬로 극장 문 앞에 서서 우리를 지켰고 우리는 또다시 학교로 들어가야 했지만 가끔 있는 그 영화 관람은 첫 휴가를 받은 병사처럼 매번 우리를 설레게 했다. 

그런데 “영화요”하고 플래카드를 올려다보며 영화를 극장이 아닌 왜 이런 곳에서 보느냐는 듯 의아해하는 여학생에게서 이 가을 내 나이의 무게를 새삼 또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 오늘은 지금 이대로도 좋다. 다시 차를 몰아 가을들판으로 나간다.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일렁이는 알찬 곡식들이 아름답다. 이 벌판을 플로어 삼아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년 전에 봤지만 아직도 가슴을 울리는 알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는 가을이 되면 늘 생각난다.

괴팍한 퇴역장교 프랑크는 수류탄 사고로 두 눈을 잃은 맹인이다. 그를 돌보는 아르바이트생 찰리와 뉴욕 여행을 떠난다. 프랑크는 멋진 최고급 여행을 자신의 마지막으로 삼고 여행의 끝은 죽음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리고 시작한 두 사람의 여행.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권총자살을 하려는 프랑크를 “당신에게는 인생이 있잖아요”하며 설득한다. 자극적이지도, 무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지만 두 사람의 명 연기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여러 장면이 가슴에 남아 있지만 그 중 으뜸은 탱고바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해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영화를 봤던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뽑기도 했었다. 특히 그가 했던 대사는 아직도 생각난다. 머뭇거리는 여인에게 “탱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인생과는 달리, 실수로 스텝이 엉키면 다시 추면 된다”라고 했던 알파치노의 대사를 오늘 이 가을 재해석해서 다시 듣는다. “삶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실패를 하면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참 좋은 가을날이다. 향기로운 가을들판에서 고운 햇살로 나를 다시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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