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무기
분무기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10.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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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뜰 옆 수돗가에 주황색 분무기가 엉거주춤 서 있다. 올들어 화초에 소독을 자주 하지 않아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수돗물을 사용할 때 튀는 물방울에 젖지만 원망없이 쓸쓸히 바라본다. 날이 추워지니 빈들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애처롭다. 쓸모없어 버린 고물로 방치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인다. 그 분무기는 회갑 때 막내가 보내준 선물이다.

몇 년 전 새벽기도 다녀왔을 때 거실에 키가 큰 포장지에 싸인 것이 보였다. 남편에게 물으니 막내에게 온 소포라고 했다. 포장지 겉 그림으로 보아 분무기 같았다. 포장지를 뜯어보니 빨간 소화기처럼 생긴 3ℓ 용량의 분무기가 들어 있었다. 집에 식물을 많이 키우다 보니 1ℓ 분무기로는 여러 번 약을 타야 하는 번거로움에 늘 좀 더 큰 분무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스테인리스스틸로 된 것은 너무 커서 구입하지 못하고 아쉬워하던 차에 아주 적당한 것을 선물로 보냈다.

분무기를 꺼내 어깨에 메어 보았다. 팔에 잘 안기는 것이 마음에 꼭 들었다. 뚜껑을 열어 물을 담아 꽃밭과 화분의 꽃에 직접 뿌려 보았다. 1ℓ 분무기로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뿌릴 수 있어 실용적이었다. 용량이 커 어깨에 매달려 힘겨운 듯했으나 괜찮았다.

타국에서 고된 비행 훈련을 받으며 회갑 선물로 보낸 것인데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선물보다 내 마음을 헤아리는 막내아들의 그 섬세함이 고맙고 감사했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면 다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내 속내를 보는 것 같아 신기했다. 어느 누가 분무기를 선물로 보낼 생각을 할까. 곤충 마니아였던 그 아이는 꽃을 좋아하는 엄마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막내는 내가 초등학교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집에서 생활할 때 낳은 아이다. 생각하면 나와는 셋 중에 어릴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자란 셈이다. 쌍둥이 형제는 돌 지나고 내가 집으로 이사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1년이 넘는다. 그러나 막내는 자라는 동안 다 곁에서 보고 키워 더 정이 많이 간다. 늘 ‘아갗라고 부르며 함께 지낸 시간이 많다.

어렸을 땐 잘 체하여 어른들 하던 방법으로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팔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고 바늘에 실을 꿰어 엄지손가락 끝 부분을 감아 따 주었던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어릴 때 친정어머니가 내게 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때마다 막내는 눈물 흘리며 ‘꼬매지 말고 따지마’라며 겁에 질려 크게 울었다. 어느 땐 열이 37.8도까지 올라 부모를 놀라게도 했다.

식성이 좋아 포동포동해 몸이 접히는 부분마다 살이 물러 파우더를 많이 발라주었다. 잠들 때는 잠투정이 심해 30분씩 울었고 그때마다 나는 자장가, 찬송가, 명곡을 여러 차례 아이를 업고 달래주었다. 그렇게 내 정을 주며 키운 아이라 더 각별한 데가 있다. 남들은 딸이 없다고 나를 많이 놀린다. 그러나 어느 딸 못지않게 세심한 배려와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혜안이 막내에겐 있다.

막내가 수돗가에 방치된 분무기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서운할까. 내일은 분무기를 깨끗이 닦아 2층 공간에 석곡, 풍란과 함께 겨울을 지내도록 해야겠다. 살아가며 쓸모없다 방치하는 것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나 또한 수돗가 옆에 서 있던 분무기 같은 삶은 아니었는지. 늘 처음의 그 마음으로 주어진 것을 가꾸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겨울이 오기 전에 분무기가 물에 얼어붙지 않게 막내의 마음과 사랑을 가득 담아 내가 좋아하는 꽃에 물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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