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19)-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19)-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
  • 박숙희 <청주시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4.10.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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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박숙희 <청주시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 열아홉 번째 이야기는 ‘직지’ 하권 4장에 나오는 문익 법안 선사(文益法眼禪師)가 크게 깨달은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 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문익 법안 선사에게 지장이 “상좌가 어디를 가느냐?” 물으니 법안 선사가 말하기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행각하려 합니다.” 지장이 말씀하기를 “행각하는 일은 어떤가?” 법안이 말하기를 “알지 못하나이다.” 지장이 말씀하시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친절하니라.” 문익 법안 선사가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또한 법안이 오공 스님과 더불어 불을 쪼이는 참에 향시를 잡아 일으켜서 오공 스님에게 묻기를 “향시라고 말하지 아니할 것이니 사형은 뭐라고 말을 하겠느냐?” 오공이 말하기를 “향시니라.” 법안 스님이 수긍하지 않았다. 20일 후에야 오공이 비로소 그 뜻을 밝혔다.

문익 법안 선사는 법안종의 대단한 선지식이다. 지장은 법안의 스승으로 나한계침선사(漢桂琛禪師) 이다. 상좌(上座)는 문익 법안 선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저기 발 닿는 대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서 여러 곳을 다니는 것을 이리( )라 한다. 행각(行脚)이란 말도 선지식을 찾아보려고 이 절, 저 절, 여기 산, 저기 산 등 여러 곳에 다니는 것을 말한다.

보조 법어나 조사의 법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但知不會(단지부회) 하면 是卽見性(시즉견성)이라. 다만 알지 못한 그 자리를 알면 그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지 못하는 그것이 가장 친절하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 날 화로에 불을 피워놓고 불가에 가까이 가는 것이 향화(向火)다.

향시(香匙)란 향불을 피울 때 향을 켜든지 끄든지 하는 도구이다.

법안 스님이 오공 스님에게 향시를 들어보이면서 그것을 향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죽비를 들고 그것을 죽비라고 하면 저촉이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하면 위배가 된다는 죽비자 법문과 같지 않는가.

오공 스님이 ‘법안 스님이 왜 자신의 답에 대해서 수긍하지 않는지’를 즉석에서는 몰랐는데 20일 후에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아는 것이지만 느낀 것만큼 깨닫게 된다는 것이겠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타인의 고통과 공감하고 타인의 어려움을 내 문제로 인식할 수 있을까,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미국 문화평론가 수전 손태그는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더 이상 공감할 능력도 개입할 의지도 없는 현대인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왜, 언제, 무슨 이유로 도덕적 행동을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문익 법안 선사가 깨달은 이리( )와 행각(行脚)하여 알지 못한 그 자리를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견성할 수 있는 확률은 개인의 종교나 정치적 취향과는 무관하다는 진리가 아닐는지. 문익 법안 선사가 활연히 크게 깨닫게 된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친절하니라’처럼 말이다. 즉 타인의 좋은 행동이 나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일 수도….

이는 바로 나에 대한 타인의 좋은 행동은 나의 행복지수를 올리지만 내가 직접 시현한 도덕적 행동은 내 삶에 목표의식을 만들어 준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이는 최근 독일 연구진의 결과가 주는 중요한 힌트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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