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예찬(丹楓禮讚), 아니 그 서러운 귀의(歸依)
단풍예찬(丹楓禮讚), 아니 그 서러운 귀의(歸依)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4.10.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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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一筆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충청권에서도 본격적으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지난 9월 말쯤 설악산에서 처음 목격된 올해 단풍은 최근들어 4계절의 기후변화가 헷갈리는 만큼 그 진행속도 역시 예측이 쉽지 않아 지역마다의 절정을 특정하기가 또한 녹록지 않다.

단풍은 하루 20㎞씩 남하한다고 한다. 설악 단풍이 남녘으로 내달려 오는 25일 전후쯤엔 충청의 월악산과 속리산, 계룡산을 물들인 후 곧바로 호남의 내장산과 지리산으로 상징되는 그 화려함의 최 정점을 찍고 사그러지게 된다.

불행하게도 올해 초기 단풍은 늦여름과 초가을의 극심한 가뭄 탓에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발산하지 못했다. 단풍들이 제 때깔을 내기도 전에 변색되고 고스러지는 바람에 힘들게 설악산과 오대산 등 북부권의 산을 오른 등반객들에게 예년같은 감흥을 안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충북을 비롯한 중부권의 단풍은 비록 양은 적지만 근자에 내린 한 두차례의 비 때문에 훨씬 나은 자태를 드러낼 지도 모른다.

역시 단풍은 억새와 함께 가을 정취의 으뜸이다. 그러기에 단풍이 한껏 물드는 요즘처럼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계절도 없다. 아니 TV 등을 통해 매일 전해지는 단풍 소식을 듣고도 이른바 ‘필(feel)’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이미 죽은거나 다름없다. 남자들에게는 더 그렇다. 남자의 계절이라는 가을은 하찮은(?) 남자들까지도 시인과 예술인으로 만든다.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에 정착해 아예 자신의 아호를 지리산 사람이라는 뜻의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칭한 조선 중종 때의 시인 조식(曺植)의 단풍관은 지금 들어도 유별났다. 그는 빨치산의 본거지인 지리산 피아골을 둘러본 후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이는 단풍을 봤다고 할 수 없다”면서 통상 삼홍시(三紅詩)로 불리는 다음의 말을 남겼다.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짜기에 들어선 사람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산과 물 그리고 사람까지 붉었다고 하니 그때 단풍의 운치도 요즘처럼 색색의 아웃도어가 한데 어울려 연출해 내는 분위기와 크게 다를 게 없던 것 같다.

그런데 단풍은 그 화려함 뒤에 상실의 의미를 잔뜩 숨기고 있다. 단풍 자체가 찬 기운으로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단풍은 마치 혼신의 힘으로 임종을 맞이하는 잎사귀의 마지막 미소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낙엽귀근(葉歸根)이라는 중국 사서의 사자성어다. 잎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다시 낙엽으로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이 말은 공교롭게도 혼외 아들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자신의 퇴임사에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바람에 화제가 됐다. 당시 채동욱은 비록 자신은 어쩔수 없이 떠나더라도 떨어진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 다시 거름이 되듯 앞으로도 계속 검찰을 위하겠다는 뜻을 시사했겠지만 원래 이 말에는 ‘떨어지는 잎사귀는 흙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올 때를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 강하다.

이렇듯 낙엽의 일보직전이랄 수 있는 단풍은 한편으로 슬프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도 오히려 삶의 아픔과 비련, 고통을 읊조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이다.

‘핏빛으로 떨어지는 단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생의 입술만큼이나 요염하고, 폐결핵 환자의 각혈인 듯 섬뜩하며, 살육의 현장에 뿌려진 보복의 피처럼 처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단풍을 바라보며 제주 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를 오버랩시켜 아픔을 표현하려 했던 저의(?)는 분명하다. 화려함을 뒤로 하고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단풍의 윤회는 다름아닌 인간이 나이들어 숙명처럼 만나는 서러운 귀의(歸依), 처음의 헛것(無)으로 돌아감을 깨우치기에 그렇다.

하여, 이번 주말엔 가까운 산이라도 찾기를 바란다. 아직은 덜 하겠지만 깊어가는 가을, 지금 만나는 단풍은 그 자체가 사유(思惟)이고 정념(情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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