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10.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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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끝없이 펼쳐진 강가를 따라 퇴색해가는 햇살을 받으며 선착장에 도착했다. 제법 바람은 뾰족하게 불어오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국에서 고요한 하루가 적막하게 저물고 있었다. 그리 예쁠 것도 그리 미울 것도 없는 강가에서 덤덤한 독일인들이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라인강의 잔물결 속에 모든 상념들을 띄워 놓고 텅 빈 상자처럼 서서 유람선을 기다렸다. 강가를 따라 난 기차 길엔 화물을 가득 실은 기차가 애벌레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기차 위로 펼쳐진 산언덕에는 마치 보성의 녹차 밭을 연상케 하는 포도밭이 가득했다. 포도밭은 반듯반듯한 이마를 빛내며 강물에 제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배를 타고 긴 강의 몸을 조금씩 잠식해갔다. 배 위에 올라 난간을 잡고 섰다. 무채색의 점퍼를 입고 짧은 퍼머 머리를 바람에 맡긴 채 아주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 시선 따위는 신경 안 쓰겠다는 듯 꾸밈없이 나들이 나온 그 당당한 모습이 좋아보였다. 외출할 때면 애써 치장을 하며 예의라고 스스로 다짐했던 나를 떠올렸다. 어쩌면 자신감의 결여였을지도 모른다. 머리카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마음을 온통 헝클어 놓았다. 바람은 제멋대로 불어와 온몸을 헤집고 제 멋대로 나부끼며 달아나버렸다. 바람의 행로를 보며 먼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학창시절 어느 끄트머리에선가 배운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노래가 이국의 하늘에 낯선 발음으로 울려 퍼졌다. 나지막하게 우리말로 따라 불러 보았다. 132미터에 달하는 높은 절벽에서 황금색 긴 머리칼을 빗으며 노래하던 로렐라이가 이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단다. 전설 속의 그녀는 가슴 속에 얼마나 큰 아픔 덩어리를 달고 이곳으로 풍덩했을까? 얼마나 크나큰 아픔이었으면 이 긴 강물에도 다 풀어헤쳐 녹이지 못했을까? 투신 후 어스름 저녁이면 나타나서 뱃사람들을 노래로 유혹해 목숨을 앗아갔다는 팜므파탈의 여인! 그녀의 아픔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을지 가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언덕에 올라가 그녀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기나긴 시간 속에서 아픔을 토해내고 있는 듯 했다. 내 사진 속에 그녀의 아픔도 함께 클로즈업했다. 싸늘한 그녀를 스쳐 언덕의 난간에서서 강줄기를 굽어보았다. 아득했다. 그 아득함 아래에 길게 뻗은 강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어스름 저녁에 이 언덕에서 불렀을 그녀의 쓸쓸한 노래를 상상해 보았다. 홀로 눈물지었을 그녀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사춘기가 내게도 있었다. 그 시절 나도 그녀처럼 인생의 언덕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저 산다는 것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서늘한 그릇에 담긴 얼음처럼 서걱이며 세상에서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홀로 아픔을 삭이던 날들이 있었기에 다른 이의 아픔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로렐라이 언덕에 올라 오래전 전설을 가슴으로 들으며 생각에 젖어 본다. 아직도 사춘기 소녀처럼 여물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나를 돌아본다. 더 많은 사유의 바다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캐내야 하리라. 로렐라이처럼 강물 속에 투신하여 다른 이 까지 아픔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승화하여 세상으로 나아가 다른 이의 아픔까지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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