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지 못한 향기
내가 맡지 못한 향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10.1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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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옆방에 들렸다가 작은 깨우침을 얻었다. 난꽃이 준 가르침이었다. 

요즘 난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 특히 선물용 난은 더욱 그렇다. 향은 없어도 꽃대가 잘 올라오는 난을 개량했는지 내 머릿속의 향을 품는 난은 보기 어렵다. 

내 머릿속 난향에 대한 기억은 보길도가 으뜸이다. 윤선도의 봉건국을 방문했다가 한여름 정자 옆 연못가에서 느낀 난향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더위를 씻겨주는 내음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듯 했지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고 돌았지만 꽃은커녕 비슷한 풀조차 찾지 못했다. 젊은 시절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아리따운 여인을 두고 내리듯 안타깝게 포기해버린 기억이 생생하다. 덕유산 산속에서 냄새는 자욱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더덕에 대한 기억과 상통한다. 아리따운 여인과 더덕은 나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코는 나름 밝아서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서 무슨 반찬인 줄 아는 나를 어머니는 개코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음식의 맛이 갈라치면 나보고 냄새 맡아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대답은 자주이랬다. ‘예, 저는 먹어도 되는데 엄니는 드시지 마세요.’ 소화기능이 좋은 나야 아무거나 먹어도 탈이 없었지만 남들이 먹으면 걱정되는 남은 음식들이 당시에는 많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길게 고백하겠지만 스무살 첫사랑의 상처도 냄새와 함께 왔다. 별거 아니다. 그녀가 쓰던 샴푸가 대중화되면서 그 향기가 나를 몇 년 동안이나 괴롭혔다는 말이다. 당시에는 샴푸가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그녀는 군속인 아버지 덕분에 당시에도 그것을 썼고 하필 그 샴푸를 국내기업이 대대적으로 판매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버스에 가득한 그녀의 향기에 나는 괴로워했다. 그녀는 자리에 없었지만 그녀의 향기는 곳곳에서 넘쳐 흘렀다.

차를 마시면서도 향이 좋은 놈은 입에 닿기 전부터 즐겁다. 때로는 차를 따라버린 빈 첫잔에 코를 박고 ‘이신’(怡神)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신은 즐거운 정신상태를 말하는데 이를테면 정신을 차리면서도 가볍고도 편안해지는 것을 말한다. 피곤한 오후에 냄새를 맡다 보면 피곤이 가신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잔도 마시는 잔과 냄새 맡는 잔을 구별해서 대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향은 ‘맡는다’는 표현 대신 ‘들린다’고 쓰길 좋아해서 그 잔의 이름을 문향배(聞香杯)라고 부른다. 혹여 차 대접을 받을 때 잔의 끝이 열리지 않고 곧바르게 마무리된 것이 있으면 입에 대면 안 된다. 거기에 따랐다가 먹는 잔에 차를 옮기고 빈잔에 코를 박고 내음을 즐기면 된다. 차의 종류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녹차는 싱그러운 풋내음이 나는 것이 좋은 차다. 

입은 하나지만 눈, 귀, 콧구멍이 둘인 것을 보면 동물에게는 시각과 청각만큼이나 후각도 중요했던 것이 분명하다. 개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감각이지만 사람은 이제 너무나 퇴화된 것이 바로 후각이다. 개가 곳곳에 오줌과 똥을 넣는 것은 바로 그 후각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인데 코가 멍청해진 사람은 그런 개의 행동을 말 그대로 개 같은 짓으로 여겨 그들의 세계를 무시한다. 요즘 병원에서는 개를 이용해서 암도 찾아내는 데도 말이다. 

옆방의 난꽃의 이름은 소심(素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난향은 사람에 따라 맡지 못하는 것도 있다고 전한다. 그 말을 듣고 많이 반성했다. 내가 못 맡는 사람의 향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내 개코만 자랑하다가 정작 그 사람의 향기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사람마다의 향기가 가득한 계절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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