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다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4.10.14 2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길을 나선지 13일째입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걷고 있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어제 밤에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가득합니다. 먼 산의 나지막한 봉우리에 구름들이 내려앉아 마치 하늘과 땅이 맞닿은 듯합니다.

열흘 넘게 길을 걷다보니 차가 많이 다니는 큰 길을 피하는 요령을 차츰 깨쳐갑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검색하면 새로 만든 큰 길옆으로 옛 국도나 지방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을 찾아 걷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때론 방향을 잘못 잡아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일도 있고, 농로를 헤매기도 합니다. 그리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상점 하나 나타나지 않아 축산분뇨 냄새가 풀풀 나는 길가에서 버너에 불을 피우고 컵라면과 커피를 끓여 먹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김제에서 신태인으로 가다가 만난 ‘여수해로(麗水海路)’는 이름도 특이했지만 그 풍경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지평선을 이루고 그 주변으로 옹기종기 박혀있는 집들은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따뜻한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그 길가에서 추수한 벼를 펴서 말리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이상한 차림의 여행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농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람을 만나 말을 섞어 본 것도 길을 나선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길가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농사가 잘 됐는지를 물었습니다. 농사는 잘 되었는데 농자재 값, 비료 값, 기계 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거기에 쌀 수입이 전면 개방되고 수매가도 좋지 않다며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땅을 놀리지 못해서, 천직인 농사를 차마 버리지 못해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픔은 절절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아름답고 포근한 풍경만을 보았을 뿐 이 풍경 뒤에 숨겨있는 애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길은 효율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정읍에서 고창으로 가는 왕림로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길에서 예기치 않은 여행자를 만나는 것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영어였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은 ‘웡춘체’이고 직업은 그래픽디자이너인데,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을 자전거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한 달씩 휴가를 내서 태국,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주변나라들을 자전거로 여행했고 한국이 여섯 번째 나라라고 합니다. 왜 4대강을 따라 잘 닦아 놓은 자전거도로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보고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일반도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자전거와 트레일러 등 여행 장비를 비행기에 싣고 와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을 누비며 여행하는 용기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도 한국에 와서 이렇게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며 반가워했습니다. 찌든 땀 냄새가 밴 그와 가벼운 포옹으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다시 걷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걷기열풍이 대단합니다. 자치단체들은 올레길이다, 둘레길이다 하면서 걷는 길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멀리 찾아가야 하는 일상적인 삶의 경계를 벗어나 경치와 공기가 좋은 곳을 운동 삼아 걷는 길들입니다. 그러나 걷기는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유와 마음의 탐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걷기를 위한 걷기, 박제된 걷기가 아니라 주위의 삶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고 우리의 삶과 동화되는 걷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변에서 한적하고 멋진 도로들을 찾아내 걷는 도로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