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도 詩가 되는 날
커피도 詩가 되는 날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10.1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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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매주 금요일은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기분에 따라 도서관이나 카페로 가기도 하고 들녘으로 나가 야생이 되기도 한다. 세상 문으로 향하는 길에 빗장을 걸어놓고 평소 시간에 쫓겨 읽지 못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한다.

올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문학의 화두를 따라 긴 여행을 하면서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의 사상을 훑으며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지만 지금도 플라톤을 떠나 철학과 인문학을 논하기는 어렵다. 

한 달 전 학생들과 그리스 철학의 핵이라고 기준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감상하며 생각을 나눴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토론 수업을 통해 ‘동굴’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는 고정관념에 묶여 크고 다른 세상을 볼 줄 모르는 고지식한 어른들이라고 비유했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고 견뎌낸 통과제의식 동굴이 아니라 짐승의 우리와 같은 공간기능의 동굴이라는 것이다.

수업이 끝날 무렵 플라톤이 강조하는 본질을 설명하려고 그림자놀이까지 마련하여 준비한 것을 고정관념이라는 쇠사슬에 갇힌 어른이라는 말끝에 움찔하여 천만다행으로 죄수(?)의 사례가 될 뻔한 그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기존의 상식과 가치 파괴 없이 새로운 가치 창조는 어렵다. 숫눈처럼 새하얀 아이들의 광장에 기성세대가 일반화시키고 보편화시킨 먹물로 폭력을 행사할 순 없는 일이다. 

들고 나온 박홍순의 ‘미술관 옆 인문학’ 을 읽다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시선이 멈췄다. 중앙에 나란히 서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손이 가리키는 위치를 살펴보면서 그림 속 인물들의 특징으로 알아보는 그리스 철학 사조를 수업 활동지로 만들었다. 불쑥불쑥 일어나 논쟁 벌일 아이들의 열띤 모습이 커피잔 가득히 파노라마를 일으킨다. 

동화처럼 예쁜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은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논술수업은 시기를 타는 주제가 많아서 늘 숙고하고 끊임없이 활동지를 만들어야 하는 버겁고 고독한 길이지만 내게는 순백의 아이들이 있는 학교가 성전이며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수업이 거룩한 예배와 같다.

그래서 모든 수업이 끝난 금요일이면 노트북과 책가방을 들고 카페로 간다. 독서하며 마시는 커피는 그 순간부터 대상을 불러내는 마중물로 치환된다. 기분에 따라 몇 가지 혼합된 아메리카노도 좋고 비오는 날에는 콜롬비아나 케냐 커피도 좋다. 가슴이 고요하고 그리움이 있는 날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찾는다. 커피의 귀부인이라 할 만큼 예가체프는 살짝 신맛과 어우러진 부드러운 쓴맛이 시향을 내기에 좋다.

한때 로마 가톨릭에선 악마의 커피이며 뉴스의 본거지라고 하여 카페를 폐쇄하는 국왕도 있었지만 쇠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오면 통찰할 수 있는 일이다.

커피마니아로서 카페가 휴식과 친교의 공간으로 변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사유하며 조용히 마시는 커피는 그윽해서 좋고 둘이 마주앉아 나누는 커피는 정겨워서 좋다. 가끔 남편이 퇴근길에 들고 온 이벤트 커피는 젊은 날의 연애처럼 낭만적이어서 좋다.

물질을 떠나 대상으로 다가오는 커피는 시(詩)가 된다. 오늘은 그리스 아테네 어느 농장에서 플라톤이 서빙해준 최고의 브랜드 커피를 마신 날이다. 커피도 시가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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