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외로운 지킴이(2)
청주의 외로운 지킴이(2)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10.1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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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그가 병이 낫지 않고 세상을 뜨게 되자 그의 종형인 김희일과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모두 60척, 18.9m 정도의 철통 30단을 세웠다. 당간 꼭대기에는 용머리가 있었고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었으며 여의주에 고리를 만들어 깃발을 걸었다.

당간에는 “당간을 세우는 사람은 신심이 크게 되고, 바라보는 사람마다 간절한 소원을 빌게 된다. 진실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철장대요, 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절실한 염원을 담고 있었기에 절이 폐사된 뒤에도 당간만은 남아 청주 사람들의 소망을 발원해주며 천년 세월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당간에 새겨진 글을 자세히 보면 당간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이 보인다. 학원경(學院卿)과 학원낭중(學院中)이라는 관직이 눈길을 끄는데 당시 청주지역에 교육 기관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지금까지도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유명한 것은 바로 이런 것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철통을 주조하고 조립한 기술과 글자를 양각한 솜씨를 보면 당시 철을 다루는 기술과 지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直指)가 탄생한 청주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청주는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배가 지나가는 모양으로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주성(舟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고려 초 혜원이라는 스님이 전국의 이름난 절과 경승지를 순례하던 중 청주의 율량고을에 쉬어가게 되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와 세찬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이에 혜원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빌었다. 얼마 후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뜨더니 부처님이 나타나 곧 용두사로 가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우라고 하였다. 날이 밝자 용두사로 간 혜원은 용두사 주지 스님도 간밤에 같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두 스님이 사흘동안 고심하여 보았지만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한 초립동이 절 마당에서 ‘소금 배가 들어올 텐데 돛대가 없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목암산(우암산)에 올라가 사방을 살피면 알 수 있다’ 고 말하고 초립동은 홀연히 사라졌다. 두 스님이 목암산에 올라가 가만히 내려다보니 청주 고을이 천천히 북쪽으로 떠내려가고 있는 행주형의 지형이었다. 이것을 본 두 스님이 용두사에 배의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웠으며 그 후로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이 폐사된 후에도 철당간은 남아서 청주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발원해주며 천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각종 공해와 도심의 오염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어 안타깝지만 그나마 철당간 보존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높은 건물에 가려져 다소 초라해 보이는 철당간. 쇼윈도의 마네킹보다 지금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지만 그 옛날 사람들은 저 당간을 우러러보며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을까. 청주 사람들의 염원을 가득 안고 천여 년을 이 고장을 지키며 우뚝 솟은 용두사지철당간. 다시 한 번 두 손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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