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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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10.0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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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계절의 바람을 타고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귓전에 불어 왔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며 며칠째 시를 읽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를 외우고 있었다. 문학제에서 시를 낭송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작가를 기리는 뜻 깊은 축제다. 거기에 동참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기에 선뜻 시낭송을 하기로 했다. 일단 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멋지게 낭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뇌세포가 파업을 하는지 시가 외워지지 않았다. 

첫날은 그냥 읽었다.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다시 읽었다. 두 번째날은 시를 노트에 베꼈다. 그리고 세 번째날부터 녹음을 했다. 시를 읽으며 녹음을 하고 그것을 들어보고 다시 녹음하고 또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읽고 쓰고 녹음하고 들어보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날은 사람들 앞에서 실제 상황처럼 시를 낭송하고 이상한 부분을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해서 했다. 잠들기 전 외워보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중얼거려 보았다. 집안의 곳곳에 시선이 가는 곳마다 시를 프린트해서 붙여 놓고 읽어댔다. 

행사가 있기 하루 전날. 무대에 어울릴 만한 옷을 찾아 헤매며 옷가게를 기웃거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우아하면서도 튀는 그런 옷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냥 적당한 옷을 걸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나를 들쑤셨다. 그러나 그 생각들을 꽉 접어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보냈다. 그래도 무대에 서는 일인데,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인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마음에 평화가 올 것 같았다. 

용암동 옷가게와 사직동 옷 가게를 훑었다. 원하는 옷은 없었다. 하루종일 도시를 헤집고 다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옷 중에 적당한 것을 입어야겠다고 체념을 한채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코너를 도는 순간, 작은 옷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그곳에 반짝반짝 내 눈에 띄는 옷이 있었다. 마네킹에 입혀 놓은 옷인데 맞는 사람이 없어 반품하려던 참이라고 주인은 반가워한다. 나도 반가워서 그 옷을 아예 입고 집으로 왔다. 

낭송을 하러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세상에는 왜 그리 목소리 좋은 사람도 많고 낭송 잘하는 사람도 많은지 리허설을 보며 겸손하게 살자고 혼잣말을 되뇌어 보았다. 순서를 기다려 나도 낭송을 해 보았다. 마이크를 타고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제법 낭낭했다. 리허설이지만 실제 사람이 앞에 있는 것처럼 시선을 객석에 골고루 뿌려보고 미소도 환하게 날려보았다. 

그때 무대를 가득 메운 조명보다도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객석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쿵하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내가 짝사랑 했던 남자였다. 그 시절 그 사람을 보는 날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고 모든 일이 잘 풀렸었다.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무대를 내려와 그에게로 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전에 교수님께 수필론을 들었습니다. 혹시 기억 하시나요?” 당신을 흠모했었노라는 말은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오랜만이네. 시를 쓰나?” “아니오 수필 써요.” 내 추억속의 남자는 여전히 멋진 모습으로 행운의 메시지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귓전을 울렸다. 사물놀이의 축하 공연과 문학강연이 끝나고 시 낭송이 있었다. 지난 시절의 교수님을 보며 그 행운의 예감 같은 살인미소를 보며 행복한 시 낭송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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