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의 사람
등 뒤의 사람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10.0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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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저녁 이내가 스며드는 푸른 시간. 아들이 저만치 걸어간다. 양쪽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리듬을 탄다. 콧날이 시큰하다. 나는 발끝에 힘을 준다. 얼룩무늬 군복 속에 감춰진 다부진 등으로 아들은 말한다. 걱정 마시라고. 괜찮다고. 누런 들녘을 건너온 서늘한 바람이 귀밑머리를 간지른다. 나는 등 뒤에서 다 하지 못한 응원의 말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부대 정문이 닫히고 뒷모습이 사라진 자리엔 빠른 속도로 땅거미가 내려와 고인다.

“귀똘귀똘, 찌르르 찌릉, 호로롱 호로롱….”

누구 노래인지 울음인지 가늠할 수 없는 여러 갈래의 소리들이 물줄기처럼 흘러간다. 발길이 쉽게 돌아서지 않는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은 여운처럼 한 장의 사진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상대가 누구든 그리 오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엔 참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스러진다.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이 살아나 풀벌레 소리처럼 합창을 하며 마음에 무늬를 그린다. 자식의 등은 애틋하고 엄마의 등은 애잔하고 쓸쓸하다. 그 등에 대고 가슴속에 아껴둔 말들 잊고 전하지 못한 기도 같은 메시지들을 보낸다.

엊그제 끝난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도 아름다운 등 뒤의 사람들을 만났다. 16일동안 짜릿한 승부 끝에 울고 웃던 선수들의 다양한 몸짓들. 선수 뒤에서 환희와 안타까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코칭스태프들, 그리고 경기장 관중들의 생생한 표정이 담긴 특별영상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렇게 등을 바라보며 함께 땀방울을 나눈 사람들이 있었기에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열전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힘이 되리라.

임권택 개·폐회식 총감독은 “하나의 신기록이 탄생되기까지 한 사람의 승자 뒤엔 수많은 이들이 함께 한다. 그 등 뒤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기쁨의 순간들을 재조명해 함께 한 모든 이들을 주인공으로 비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스포츠 축제가 아름다운 이유다.

하지만 나는 가끔 잊는다. 그렇게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박수 치고 가슴 졸이며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이루어낸 모든 것이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양 우쭐해 하다 추수가 시작되는 시월이 되면 비로소 등 뒤를 돌아보며 은혜로움을 생각한다.

마음이 황무지처럼 빈 밭이 되어 잡초가 무성해질 때마다 채근하고 위로하며 마음 밭을 일구도록 도와준 사랑. 몸이 아플 때, 일이 버거울 때 망설이지 않고 뒤에서 등을 밀어준 사랑을 기억해 내고 그 힘으로 오늘 내가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하여 올가을, 삶에서 거둘 수확이 크지 않아도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다. 등 뒤에서 나를 지켜주는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꿈꾼다. 사는동안 가족을 넘어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을 지켜주며 응원하는 따뜻한 삶, 아름다운 등 뒤의 삶을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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