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사이버 망명’ 논란
부끄러운 ‘사이버 망명’ 논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4.10.05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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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러시아에서 개발된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의 모토는 ‘사생활권이 보장되는 대화’(Talking back our right to privacy)이다. 이용자의 보호와 보안을 최우선 가치로 꼽는다는 말이다. 전송된 모든 메시지를 암호화 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전달된 메시지는 복사되지 않는다. 텔레그램을 개발한 두로프 형제는 러시아 정보기관과 미국 국가안보국(NSA)도 감시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지난해 수억원의 상금을 걸고 개최한 국제 해킹 콘테스트에서도 ‘텔레그램’은 뚫리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최근 텔레그램이 국내에서 주목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달 18일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수사팀’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다. 앱 다운로드 순위 100위권 밑이던 텔레그램은 검찰 발표 이후 사흘 만에 45위로 뛰고 24일에는 국민 메신저로 부동의 선두를 고수하던 카카오톡까지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2만에 불과했던 국내 이용자가 2주만에 26만명으로 13배나 늘었고 증가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있다. 인터넷 이용에 제한을 받는 사용자가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외 서버로 활동근거를 옮기는 이른바 ‘사이버 망명’이 시작됐다는 논란과 함께 이 현상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사이버 전담팀을 꾸린 검찰은 포털과 모바일 메신저 사업자들까지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메신저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을 강화해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허위사실 유포사범은 벌금형이 아닌 재판 회부를 원칙으로 하고 최초 유포자는 물론 퍼나른 사람까지 엄벌하겠다고 했다. 이같은 검찰의 방침은 사이버 사찰·검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카톡이 실시간 감시당할 수 있다는 우려를 확산시키며 텔레그램의 급부상을 초래했다.

검찰은 “메신저 같은 사적 공간은 대상이 아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현직 검사장과 대검 간부 등을 포함해 검사들의 텔레그램 가입도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경찰이 카톡 친구가 3000명에 달한다는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의 카카오톡 계정을 압수수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지난 4월 발표한 ‘2014 언론자유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를 197개국 중 68위로 평가하고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판정했다.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남미의 칠레가 공동 67위로 우리를 앞섰다. 우리나라는 89년 언론 자유국이 됐다가 2011년부터 부분적 자유국으로 전락했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평가하는 국가별 언론자유지수에서도 우리는 57위에 그친다. 언론자유지수 1·2위를 다투는 핀란드와 네덜란드에서 텔레그램 다운로드 순위는 250위권 밖이다. 텔레그램이 1위로 치고올라온 것은 우리의 언론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이버 언어폭력과 명예훼손이 위험수위에 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이버 폭력 근절에 사생활과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까지 저당잡힐 수는 없다. 명백한 증거와 출처를 남기는 사이버 범죄의 특성상 수사 의지와 처벌 수위를 높이는 선에서도 얼마든지 피해를 줄일 수 있다. IT 강국이자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건 나라에서 온라인 소통창구를 해외로 옮기는 사이버 망명객들이 대거 양산되는 것은 민주적 가치 훼손을 넘어 국가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국내 정보통신기술 업계들도 이미 국내 업체 가입자들의 이탈에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정부와 검찰이 국민의 불안을 종식할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국민의 정치 참여와 정책적 논쟁을 제어하고 정권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옥죄이려는 의도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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