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도토리묵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10.05 18: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툭, 산책로에 도토리가 내 앞에 떨어진다. 다시는 줍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산책을 나왔지만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도토리를 줍는다. 가을 접어들며 한동안 거듭된 일이 몸에 익숙해졌다. 어릴 때 재미로 줍던 도토리,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올해는 유난히 도토리가 풍년인지 산책로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사람들을 자주 본다. 산책길은 도토리나무가 주류를 이룬다. 가을 들어 산책보다 도토리 줍는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처음엔 도토리를 주워 다른 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은근히 욕심이 생겨 외투 주머니가 산책 후엔 도토리로 채워진다.

그렇게 산책길에서 조금씩 모은 도토리를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한 말이 좀 안되었다. 방앗간은 도토리와 고추 빻는 사람들로 붐볐다. 차례 줄이 길어 기다리다 지루해 비닐봉지에 내 연락처를 적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단에 물을 주고 있을 때 연락이 와 도토리 빻은 것을 힘겹게 집으로 들고 왔다.

도토리를 집으로 가져왔으나 자루가 없다. 준비도 없이 시작해 막막했다. 생각 끝에 얇은 겹 보자기 한 곳을 타서 그 속에 도토리 빻은 재료를 넣고 단단히 묶은 후 큰 함지에 물을 부었다. 방앗간에서 들었던 정보, 물을 서너번 우려내고 밟으면 훨씬 쉽다고 일러주었다. 세면실에서 물을 받은 큰 함지에 도토리 가루를 넣은 자루를 푹 담갔다. 떫은맛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황갈색 물이 함지에 가득했다. 세번 정도 따라내고 자루를 밟았다. 온통 세면실 내부가 도토리 밟은 물방울이 튀어 흰 벽과 바닥에 여기저기 얼룩을 만들었다. 분명히 바닥에 닿으면 색깔이 칙칙해질 텐데 염려되었다. 아니나 다르랴 바닥 타일 틈새의 하얀 줄이 황갈색이 되었다. 마치 청소하지 않아 찌든 것처럼 변하고 있다. 그러나 밟고 나니 임시 자루로 사용한 것이 엉글어 잔유물이 많았다. 하는 수없이 고운 자루에 다시 밟은 물을 넣어 걸렀다.

유년시절 우리 마을 도랑은 온통 검정색이 되었다. 집집마다 우려내는 도토리 물로 개울의 흙들이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때 배고프던 시절 묵 장사로 마을은 차츰 윤택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토지도 구입해 재산을 늘렸다. 우리 집도 검은 가마솥에 도토리 우린 앙금을 넣어 묵을 쑤곤 했는데 그때마다 가마솥바닥에 묵 누룽지가 눌어 한쪽이 탄 놋숟가락으로 긁어낸 누룽지가 졸깃졸깃 맛이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아궁이 앞에 지키고 앉아 그것을 기다리던 때가 아련하다. 그때는 가정의 식량과 수입원으로 묵 장사를 하였지만, 지금은 놀이 삼아 하는 일이 되었으니 부모님의 고생 덕분에 자식들은 양식 걱정 없이 풍요롭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세면실에서 밟아 우려낸 물이 걸쭉했다. 앙금이 가라앉으면 그것으로 묵을 쑨다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 함지에 있는 갈색 빛 물에 손을 넣어보니 전분 같은 것이 묻어났다. 윗물을 따라내고 주방으로 가져와 작은 양푼에 넣고 묵을 쑤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덩어리만 커지고 젓는 데 힘이 들었다. 물이 부족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우족을 삶는 큰 솥에 쏟아 물을 더 부은 후 남편이 힘 있게 젓기를 시작하자 덩어리가 조금씩 풀리며 묵모양이 갖추어졌다. 보글보글 끓은 후 네모난 판에 얇은 헝겊을 깔고 내용물을 부었다. 울퉁불퉁하지만 처음 만든 작품이라 마음이 흐뭇하다. 아침이면 응고된 묵을 갈라 이웃에 나눌 생각을 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