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외로운 지킴이(1)
청주의 외로운 지킴이(1)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10.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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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청주시내 한 가운데 외로이 우뚝 서있는 용두사지철당간. 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그렇게 청주를 지키고 있다. 머리를 들어 철당간을 바라보니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싶어진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많은 사찰이 세워지고 당간도 건립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당간은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은 곳이 대부분이다. 당간까지 남아있는 것은 공주 갑사와 안성의 칠장사 그리고 청주의 용두사뿐이다.

용두사는 신라 말에 창건하여 고려 말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아마 역사 기록에 왜구가 미호천까지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한 사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잦은 침입으로 청주 흥덕사와 함께 전란에 휩싸여 소실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幢)이란 일반 깃발이나 비단으로 만든 신령한 깃발을 의미한다. 또 당이라는 깃발은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달아두는 장대를 말한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그러니까 깃을 매다는 장대를 지탱하는 받침돌을 뜻한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 사찰 입구나 경내 설치해 마군을 물리치고 불법(佛法)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유행한 불교 양식이다.

그러니까 당간이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 등이 있을 때 깃발을 걸어두는 기구인데 오늘날의 태극기를 달아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당간의 형식은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솟대가 신성한 지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면 당간은 불교에서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불법 수호의 상징인 용을 장식함으로써 사찰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간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철당간, 석당간, 목당간이 있으며 간두의 모양에 따라 용머리 모양을 한 용두당, 여의주로 장식한 여의당(마니당), 사람모습을 한 인두당 등이 있다. 철당간으로는 보물 256호인 공주 갑사의 철당간과 경기 유형문화재 39호인 안성 칠장사 당간과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3개만 남아 있다.

그러나 명문이 들어간 당간은 용두사지 철당간 말고는 아무데도 없다. 그래서 10세기 경 청주 지역 문화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국보 제 41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높이 솟은 철 구조물이라 낙뢰를 비롯한 오랜 세월 풍파에 견디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철로 만든 당간은 거의 사라지고 당간을 받치던 당간 지주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고려 광종13년(962년)에 조성되었다. 본래 30단의 철통으로 약 20여 미터 정도로 지금의 아파트 6~7층 높이에 해당한다고 할까. 청주의 등대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20단의 철통만 남아 있다. 10개는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주조를 하려고 가져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만들 당시 역사적 사실이 아래에서 세번째 철통에 명문이 해서체로 양각되어 있어 건립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당간이다. 당간기를 보면 준풍(俊豊)이라는 연호가 있는데 이 기록은 고려 광종이 자주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용두사지 철당간은 고려 초, 이 고장 청주의 호족이며 권문세가 집안인 김예종이란 사람이 당시 유행하던 병에 걸려 용두사에 당간을 시주하겠다는 발원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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