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나서며
길을 나서며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4.09.30 2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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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프리랜서 기자>
길을 나섰습니다.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는 있지만 그저 남쪽을 향한다는 것 말고는 며칠 동안을 걷는다거나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적지를 말하긴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멀리 걸어본 경험이 없거나와 체력적인 준비도 덜돼서 염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걷기를 가장 쉬운 운동으로 생각했지만 하루에 20여 킬로미터씩 서너 시간을 계속해서 걸을 때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걷기가 하루 이틀에 끝날지 한 달 이상을 이어갈지 지금으로써는 전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체력이 허락하는 만큼, 생각이 미치는 만큼만 걸을 작정입니다.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길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61세의 나이에 걷기 시작해 4년 동안 실크로드 1만 2천 킬로미터를 횡단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 나는 걷는다 -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의 1099일 >이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였습니다. 10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도전할 수 없는 꿈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의 욕망은 느림이나 비움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먼 곳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갔고 현직을 떠나 몇 년이 흘렀는데도 그 욕망은 달라지지 않았나 봅니다. 느림이나 비움, 침묵 같은 단어들은 생경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러던 지난 8월,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5박 6일을 꼼짝 못하고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체력이 고갈됐음을 느끼며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이 없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규칙적인 운동 한번 하지 않았던 게으른 삶에 대한 반성이었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것 같은 텅 빈 머리와 사위어 가는듯한 육체 안으로 밀려오는 허망함에 대한 자각이었는지 모릅니다.

9월 한 달 동안 눈을 뜨면 한 두 시간씩 걸으면서 체력을 키웠습니다. 게으름이 밴 체질이라서 매일걷기는 어려웠지만 간헐적으로 나마 ‘직립보행의 역사이고 인체해부의 역사’라는 걷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치며 보지 못했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생명력과 인간이 독점해가는 자연에서 함께 살아가려는 동물들과 파충류와 곤충들의 몸부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각기 나름의 욕망을 향해 쫓기듯 살아온 현대인의 삶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고뇌를 떨치기 위해 산책을 시작했다는 환경운동가 레베카 솔닛은 “걷기는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 즉 호흡이나 심방박동에 가장 가까운 의도적 행위이다.

걷기는 노동과 무위 사이, 존재와 행위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걷기는 사유와 경험과 도착만을 생산하는 육체노동이다.”라고 걷기를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며칠 걷지 않았는데도 걷는다는 행위의 의미가 단순한 육체 운동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기는 사유의 공간입니다. 잡다한 많은 생각들이 피어났다 사라지고,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면 끝없이 이어지는 공상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 나이에 이런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도 꿈을 꿀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걷기를 통해 앞으로 살아야할 삶에 대해 꿈을 꾸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삶의 목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된 욕망을 벗어나는 삶인지를 관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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