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얻다
가을을 얻다
  • 김낙춘 <충북대학교 명예교수·건축가>
  • 승인 2014.09.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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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낙춘 <충북대학교 명예교수·건축가>

도시를 벗어나 가까운 교외에만 가도 자연이 베푸는 풍요로움이 풍성하다. 가깝게 다가가면 자연의 넉넉함과 아름다운 정경도 만난다.

햇볕이 따갑다. 곡식이 익어가는 볕이다. 들녘에 펼쳐져 있는 고개 숙인 벼이삭을 보니 올해도 풍년이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빛바랜 옷을 입은 허수아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빨강고추잠자리는 높은 하늘을 날고 있다. 곱게 번져가는 노을에 가을이 젖는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학교를 떠난 후 가끔 동료나 제자들을 만나면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이라며 가까운 곳에 있는 산에도 오르고 이런저런 것을 해보라고 권한다. 뭐 특별히 하던 운동도 없고 해서 언제부터인가 짬만 나면 여기저기 걷는 일이 잦아졌다.

청주 외곽에 있는 송대공원은 걷기운동을 하면서 자주 찾게 된 곳이다.

내가 사는 곳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 한동안 학교와 집밖에 모르고 지냈던 나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한눈에 들어오는 호수는 고요하고 길섶에 핀 야생화는 아름다웠다. 몇 그루 소나무와 목木백합나무 그늘만으로도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다.

가끔 산비둘기 소리도 들렸다.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새가 있는가 하면 호수위에 날아와 한참을 노닐다 가는 새도 있다. 풀과 풀 사이를 드나들며 한가로이 노니는 풀벌레 우는 가을소리도 듣는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며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큰대자로 누어 하늘도 보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도 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고는 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일 보다는 마음 아픈 일이 더 오래 가슴에 남는다. 아직도 리본Ribbon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민다. 집에 들어서면 마당 모퉁이에 있는 비어있는 개집을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던 리본의 집이다. 리본은 가족처럼 여겼던 개로 10여년 넘게 함께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무얼 잘못 먹었는지? 눈망울도 우울해 보이고 몸짓도 거북해 해서 동물병원에 갔다. 수의사 말이 가슴도 붓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란다.

수술을 하면 당분간은 살겠지만 토종개의 수명으로 볼 때 오래 살았으니 먼 곳으로 보내면 어떻겠냐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수술비용에 드는 돈이면 품종이 좋은 애완견을 구할 수 있다며 내 의중을 물었다. 순간 심경이 착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되나? 그동안 자식처럼 사랑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돈 앞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미웠다.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결정을 했다.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리본의 목줄을 풀어 주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 주었다. 가슴에 안긴 채 눈을 감은 리본을 생각하면 언제나 슬픔이 밀려온다.

간혹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보면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리본을 상상한다. 개목 사슬이 없는 곳에서 잘 살고 있겠지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하늘을 본다.

오늘도 송대공원을 걸어볼 생각이다.

나뭇가지 끝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자연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에 잠시 시름을 잊는다. 머지않아 오색으로 채색된 만추晩秋가 되면 한동안 내려놓았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지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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