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상념
가을 상념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9.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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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맑고 푸른 하늘에 한 조각 흰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은 가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여기에 기러기까지 가세하면 가을 하늘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이다. 그러나 가을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부쩍 쌀쌀해진 바람이라도 갑자기 불어오고, 낙엽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습은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쓸쓸한 모습을 지닌 것이 가을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러한 가을의 양면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

◈ 추사(秋思)
夕照紅於燒(석조홍어소) : 석양은 타는 불빛보다 붉고

晴空碧勝藍(청공벽승람) : 맑은 하늘은 쪽빛보다 푸르네

獸形雲不一(수형운불일) : 짐승모양 구름은 일정하지 않고

弓勢月初三(궁세월초삼) : 굽은 활의 기세 달은 초승달

雁思來天北(안사래천북) : 기러기 그리움은 하늘 북쪽에서 오고

砧愁滿水南(침수만수남) : 다듬잇돌 수심은 강 남쪽에 가득하네

蕭條秋氣味(소조추기미) : 이러한 쓸쓸한 가을 기분을

未老已深(미로이심암) : 늙지도 않아 이미 맛 보았네

※ 저녁에 지는 해는 계절에 관계없이 붉고 아름답지만, 가을에 더욱 붉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맑은 날씨와 파란 하늘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가을 석양을 훨훨 타오르는 불빛보다 붉다고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가을의 맑게 갠 하늘은 시인의 눈에 파랗기로 유명한 남초(草)보다 더 파랗게 느껴진다. 석양의 붉은 빛과 하늘의 파란 빛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광은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청홍(靑紅)의 조화만으로는 단조로울 수 있기 때문에 흰색과 노랑색이 거들고 나선다. 짐승 모양의 구름은 모양이 시시각각 바뀌면서 자칫 정적(靜的)으로만 느껴지기 쉬운 풍광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여기에 활처럼 둥글게 휜 초승달이 노랗게 차려입고 하늘 한켠에 떠올라 가을 하늘의 채색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렇게 황홀한 가을 풍광을 마주한 시인의 심사는 과연 어떠할까? 황홀함에 정신을 뺏긴 사이 마음 한쪽으로 슬며시 찾아온 것은 의외로 외로움과 그리움이었다. 북쪽에 있는 남편은 가을이면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편에 그리운 정을 보내오고, 남쪽에 있는 아내의 다듬이 소리에는 남편에 대한 근심이 가득 담겨있다.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을 충분히 활용하여 가을의 상념을 풀어내는 시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시인에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가을 기운만이 아니다. 시인 자신의 인생행로 또한 가을 기운처럼 쓸쓸한데, 그것도 늙은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랬다니, 그 쓸쓸함이 배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란 하늘에 불타는 저녁 놀, 여기에 흰 구름과 샛노란 초승달, 가을이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황홀한 선물이다. 이러한 황홀함과 더불어 쓸쓸함 또한 가을의 맛이다. 쌀쌀해진 날씨에 나뒹구는 낙엽들을 보노라면 사람들은 가는 세월에 대한 자각과 함께 지난 일들을 추억하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부쩍 외로움을 타게 된다. 그렇다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훌륭한 가을의 서정(抒情)이기 때문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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