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향토사학자 김예식의 '이야기 天國'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13 1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꿈의 계시로 등과한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領)
시골에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며칠 전에 도착하여 남산 밑에 깨끗한 방을 하나 얻었다. 며칠이나마 더 공부를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과거의 과별 가운데서도 가장 높이 평가해 주고 어렵다는 제술과에는 경의(經義).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논(論)의 과목이 있는데, 시, 부, 송, 책 등은 그가 자신하고 있는 과목이라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경의만은 통 승산이 서질 않았다. 성미에 맞지 않아 내내 소홀히 대해 왔던 것이었다. 그는 남은 며칠 동안 경서를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책을 펼쳤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글자는 한 자도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초조한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방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림자가 임백령의 등 바로 뒤에까지 다가왔을 때에야 임백령은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엔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백발노인이 그윽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임백령은 곧 놀라움을 가라앉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뉘시옵니까"

그는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물었다. 그러나 백발노인은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어 왔다.

"과거를 보러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래, 차비는 다 됐는가"

"……"

"그대는 큰 인물이 될 기상이 엿보이니 정성껏 시험을 보아 꼭 급제하도록 하라."

"시생은 시와 부에는 어지간히 차비를 갖추었사오나, 경의만은 아무래도 승산이 서질 않사옵니다."

임백령은 솔직하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큰 인물이 될 사람이 그래서는 안되지.

'서경(書經)' 하서편 우공장(夏書篇 禹貢章)에서 출제될 것이니, 그 부분을 열심히 읽어 외어두도록 하게."

"자네의 이름을 괴마(槐馬)라고 고쳐 써놓도록 하게. 그렇게 하면 자네는 필시 이번 과거에 급제할 것이네."

"이름을 괴마라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백발노인은 이미 방을 나가버리고 없었다.

"노인장!"

임백령은 소리쳐 부르다가 눈을 번쩍 떴다. 꿈을 꾼 것이었다. 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가 읽던 책들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해괴한 꿈이 아닌가'

틀림없이 꿈을 꾼 것인데, 그 백발노인의 모습과 이르던 말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한 번 믿어 보자.' 임백령은 '서경'의 하서편 우공장을 달달 외다시피 하고 과장에 나갔다.

꿈 속의 백발노인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단숨에 '서경' 하서편 우공장을 강론하였다.

강이 끝나고 막 나가려 할 때였다. 시관 중 한 사람이 임백령에게 강경의 과목은 합격이라고 말해 주면서 물었다.

"자네 이름이 혹 괴마가 아닌가"

"아니, 어찌 괴마라는 이름을 아시는지요"

시관이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내 어젯밤에 시관의 패를 받고 시장(試場)에 들어와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웬 백발노인이 나타나서는, '이번 과시에는 괴마라는 사람이 응시할 것인데, 가위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요, 또한 경학에 정통함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하는게 아닌가. 꿈이 하도 생생하여 지금까지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데, 자네의 강경을 들어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물어보는 것일세. 내가 듣기에 분명히 괴마라고 하였네. 그런데 자네의 이름이 괴마가 맞긴 맞는가"

"괴마는 소생의 이름이 아니라 호입니다."

"역시 내 꿈이 맞았구만. 아무튼 자네는 등과할 것일세. 기쁘이, 괴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