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연꽃
가을 연꽃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9.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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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하나 들라하면 그것은 ‘맑다’일 것이다. 가을이면 우선 하늘이 맑고, 다음으로 날씨가 맑고, 마지막으로 물이 맑다. 맑은 하늘 아래서, 맑은 날씨에, 맑은 물에 고운 연꽃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허난설헌(許雪軒)은 길지 않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호사(豪奢)를 누리는 행운이 있었다. 

◈ 채연곡(采蓮曲)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 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繫舟(하화심처계난주) :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다네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한나절이 부끄러웠네

※ 시인은 가을을 깨끗하다(淨)는 한마디 말로 표현했다. 하늘이며 날씨며 물이 다 맑다는 뜻일테지만 다소 막연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시인은 곧 가을의 표징들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날따라 유난히 길어 보이는 호수에 흐르는 것은 그냥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란 빛을 발하는 벽옥(碧玉)이었다. 푸르고도 맑은 가을 물의 모습이 이보다 선명할 수 없다. 이러한 가을 물의 진객(珍客)이 있었으니 연꽃이 그것이다. 여름부터 피어 있던 연꽃은 이제 우거질대로 우거졌고, 연밥도 제법 통통하게 매달렸다. 그래서 연꽃밭 깊숙한 곳에서는 연밥 수확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사람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이 타고 온 배도 보이지 않는다. 목란(木蘭)나무로 만든 이 배는 연꽃 사이에 매어져 있는데 그 배의 임자는 다름아닌 연밥 따러 나온 아가씨의 낭군(君)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무엇 때문에 배를 타고 호수 속 연꽃밭에 온 것일까? 중국에서 연밥 따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자들이 해 왔기 때문에 일을 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바로 연밥 따러 나온 아가씨와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거질대로 우거져서 남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기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 바로 가을 연꽃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목란나무 배를 끌고 연밭에 나왔고 이를 알아챈 아가씨는 이내 자신을 찾아온 연인을 향해 사랑의 수신호를 보낸다. 연밥을 따서 물을 사이에 두고 있는 연인에게 던지는 장난을 건 것이다. 

그러나 밀회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줄 알고 마음 놓고 사랑의 유희를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남의 눈에 띈 것을 알게 되자 아가씨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연밥 따는 한나절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천진난만한 사랑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맑은 가을과 우거진 연꽃을 생생하면서도 흥미롭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가을은 맑다. 하늘도, 날씨도, 물도 다 맑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이 맑지 못하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일 것이다. 가을의 맑은 풍광을 즐기다 보면 사람들 마음도 저절로 맑아질 것이다. 특히 가을의 진객(珍客)인 연꽃밭 속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행운을 잡은 젊은 연인들은 이 세상에서 맑은 가을을 가장 화려하게 즐기는 주인공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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