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17)-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17)-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
  • 박숙희 <청주시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4.09.2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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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박숙희 <청주시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직지』책 속에 오묘한 이치 있으니, 열일곱 번째 이야기는 ‘직지’하권 2장에 나오는 불감 화상(佛鑑 和尙)이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진리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불감 화상이 대중에게 조주 스님, 법안 스님의 지혜를 보여 주고자 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어떤 것이 옮기지 않는 도리입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손으로 흘러가는 물 시늉을 함에 그 스님은 살핌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스님이 법안 스님에게 묻기를 ‘상을 취하지 아니해서 如如 하여 움직이지 아니한다 하니 어떤 것이 상을 취하지 아니해서 여여 하여 부동한 것입니까?’

이에 법안은 ‘해가 동쪽에서 나왔다가 저녁에 서쪽으로 떨어지느니라.’하니 그 스님은 또한 살핌이 있다. 고 한다.

이와 같이 조주스님, 법안 스님의 말씀에 대해서  얻게 되는 것은 ‘지극히 큰 태풍은 산악을 넘어뜨리지만 그 큰 태풍도 본래는 항상 고요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과 화천의 물이 다투어 흘러가되 원래 그 강과 하천은 스스로 흐르지 아니한다.’고 한 것처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如如不動한 도리다.”라고 불감 화상이 대중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진리인가보다.

이는 옮기지 않는 도리는 여여부동해서 변천이 없고 천류가 없는 도리라는 것일 게다.

“不取嗚相(부취오상) 如如不動(여여부동), 상을 취하지 아니하여 如如 하여 부동하다”는 말은 《금강경》의 말씀이라 한다. 이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모든 법상, 물상 등을 취하지 아니해서 항상 부동하다는 것이란다. 즉 산 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을 기운, 이것이 돌게 되면  지극히 큰 태풍이 된다. 즉  旋嵐(선람)이라는 것이란다. 이는 세계가 천지개벽 될 때 큰 바람 태풍이 불면 산은 무너진다. 그 큰 바람 태풍보다 몇 백 배 강한 위력을 가진 것은 이 선람(旋嵐)이라는 것이란다. 이는 불감 화상이 《금강경》에 나오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의 도리를 승조 법사가 지은 《肇論(조론)》의 物不遷論(물부천론)으로 해석하여 각성 스님은 강해를 했다고 한다.

이렇듯 조금씩 보이지 않게 덕업을 쌓으면 하늘은 드러난 보답으로 크게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즉 가치 있는 삶, 아름다운 삶의 중요한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선비 된 사람은 글을 닦아 겉으로 드러난 보답으로 삼고, 마음을 닦아 안으로 감춰진 인연으로 삼는다는 위치와 같지 아니한가?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가 않다. 납득 못 할 불운 앞에 투덜대지 말고 글과 마음을 닦아보자. 그렇게 하려면 쌓으려는 도타운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 또한  불감 화상이 대중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그 살핌이 아닐는지….

“상을  취하지 아니하여 如如 하여 부동하다”는 말은 오랫동안 병(病)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닦은 조선 중기 저명한 문신이자 학자인 서애 유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병석에서도  ‘삶 전체’가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인양 마음을 닦으며  지은 시 한 편 읊으며 여여부동한 도리의 실천을 생각하여 봄도 좋을 듯하다.

병에 젖어서 병든 줄을 까맣게 잊고/ 늘 한가해서 한가함이 되레 싫구나.

계단을 고쳐 맑고 푸른 물을 내려다보고/ 나뭇가지 잘라내어 산봉우리 드러낸다.

대나무에 물을 주며 아침저녁 다 보내고/ 구름을 뒤쫓아서 갔다가는 돌아온다.

밤이 되면 할 일이 더는 없기에/ 달을 마중하러 사립문에 기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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