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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09.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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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자랑하고 싶은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이게 웬일인가 싶다.

학교생활에서 나에게 기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썰렁한 방학이 끝나고 청춘의 물결로 교정이 넘쳐날 때 기쁘다. 나도 청춘이 된 것 같아 좋다. 3월에 피는 벚나무 밑에서 야외수업을 빙자한 파티를 벌일 때 신난다. 물론 야외수업은 반드시 유인물이 있어야 한다. 집중도가 떨어지는데다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다. 방학이면 더 좋다. 학기가 끝났다는 안도감도 있고 드디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겨울에도 좋다. 밤늦게 흰 눈이 내린 교정에서 불을 끄고 밖을 바라보면 설국이 따로 없다.

그래도 가장 기쁜 일은 공부 잘하는 학생을 만날 때다. 내 말을 알아듣고 그것을 넘어선 생각을 해낼 때 껴안아주고 싶다.

그런 것 말고 정말 우연한 기쁨으로는 교정에서 얼굴도 잘 모르겠는 학생이 인사를 넙죽할 때다. 기억이 없는 친구가 인사를 하다니 신기해서 물어본다.

“누구요? 잘 모르겠는데….”

“저요? 선생님 수업받았는데요, 빵꾸 맞았어요.”

“허허, 열심히 하지! 다음에는 말이야.”

F 받은 녀석이라면 날 미워할 텐데도 인사를 하다니 마음씨가 고맙다. 본인의 잘못에 대해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잘 될 놈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생겼다. 저번에 실린 ‘바른 자세’에 관한 나의 글을 보고 이런 댓글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제목은 ‘넥타이를 매는 가을’이었다.

“95학번 불문과 학생입니다. 말도 탈도 많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서러웠을 법도 한 교수님의 투정 없이 정갈하고 따뜻 반듯한 글을 대하니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자세를 곧게 하게 됩니다. 철학과를 다닌 적이 있는 친구는 수년 동안 불 켜진 교수님의 연구실에 대해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새로 나온 책들과 내용에 대해서 지방에 사는 자신을 잘 설명해준다며 높이 평가하곤 합니다. 배은진”

누군지 모른다. ‘그녀’ 이리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따뜻 반듯’한 글이라는 ‘따뜻 반듯’한 글에 나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것도 우연히 들어간 인터넷에서 만난 글이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나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라서 더더욱 좋았다. 나는 선생으로서 95학번이고, 그녀는 학생으로서 95학번으로, 우리는 동기다. 그해 그녀는 그의 청춘을 시작했고, 나는 나의 청춘을 정리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그녀의 삶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나는 그 나이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따듯 반듯했나? 따뜻함에 취해 반듯함을 잊지는 않았나? 반듯은 했을지는 몰라도 따뜻했나?

오늘은 15년 걸려 번역해서 해석한 새 책이 사무실로 배달된 날이다. 궁금했지만,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꺼내보았는데 감회가 깊다. 상, 하로 이루어진 글인데 무척 무겁다. 내용이 없다 보니 크기와 무게로 승부를 보았다. 그런데 서예관련 책이라서 도판도 그렇고 가격이 워낙 세서 돌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녀라면 꼭 전해주리라. 이제는 함께 떠나온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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