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09.16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중에서 우리나라를 첫 방문지로 꼽아 내한하였다.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위한 행렬이다. 가시가 있는 곳이라서 이곳에 왔다는 방한 목적이 따뜻하다. 화려하지 않은 그의 행차는 범종교적인 차원에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땅의 약지 못해 가난하고 착한 흥부들의 가슴은 잠시나마 화롯불에 언 가슴을 녹였다.

종교마저 본질이 전도되고 자본주의의 속성처럼 상품화 되어가는 이 때, 서쪽하늘의 개밥바라기별처럼 온후한 그의 모습은 지금도 잔상으로 가슴을 뛰게 한다.

이가 빠진 사발들이 며칠씩 시렁위에 엎어져 있는 흥부네 형편처럼 비상이라도 달게 먹을 가난이지만 그곳엔 우애가 있고 인정어린 눈물이 있다. 당시 유교 이념 아래 충효와 장유유서를 익힌 양반 흥부에게는 달리 대안도 없고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가난을 벗을 비상구를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용할 양식만 욕심내는 흥부네 삶을 통해 물질이 행복의 근원일 수는 없다는 인식이지만 그렇다고 가난이 자랑일 순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게으르고 재주가 없어서 얻은 결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비루하지 않고 정도를 지향하며 양심을 잃지 않는 삶 속에는 나름대로 무형의 행복이 있다.

오늘날 21세기 찬란한 황금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행복한가. 물질의 크기만큼 행복은 비례하고 영 육간의 평안이 따라주던가. 가난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나 결코 행복의 척도일 수는 없다. 서민체험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아랍에미리트의 억만장자 만수르 역시 가진 만큼의 또 다른 고통이 있을 것이다. 빌딩의 높이만큼 그늘지듯 소유의 덩치만큼 근심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행복을 체험하고 생을 마친 법정과 베풀고 나누는 기쁨을 살다간 마더 테레사의 삶에는 무엇으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오롯한 자유로움이 진득한 무게로 내재할 것이다.

자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전(公轉)하는 우리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부모의 재산상속 때문에 법정에 서고 부모가 아들을 고발하는 마당에 적당한 가난은 인간을 오히려 인간답게 한다. 가난한 집에서 효자 나고 가난한 집의 형제들 우애가 돈독하다는 말은 박물관에 전시된 고전(古傳)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평가 받으며 가난한 흥부로 살지언정 정도를 벗어날 수 없고 불법으로 축재한 놀부의 재물 앞에 비굴하게 양심을 팔 수는 없다.

돌아가는 길이 예고 없고 가벼워야 오를 수 있는 길이 하늘이라면 쇳덩이는 족쇄일 것이다. 하늘가는 길에 입는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물질과 달란트를 의미 있는 곳에 잘 사용하고 공기의 발걸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이 세상의 작은 재물을 촛불처럼 의미를 밝히는 일에 쓰고 가볍게 귀천하는 소풍일 수 있도록 전념해야 한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 훗날 이승의 종지부를 찍을 때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을 따라 선친의 음택 주위에 난 풀을 뽑으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천국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벼워야 들 수 있는 곳이라면 지나친 욕심으로는 하늘의 빗장을 열지 못한다. 

하늘가는 길에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으므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