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마중
가을 마중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9.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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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은 산으로부터 온다. 낮은 세상은 아직 한여름인데도 높은 산은 어느덧 가을이다. 산에 가까울수록 가을은 그만큼 가까워진다. 물론 고도의 차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현상이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들이 가을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은 한여름 무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정서의 풍요로움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당(唐)의 시인 온정균(溫庭筠)은 가을을 맞으러 산에 들어가 이른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였다.

 

◈ 초가을 산에서(早秋山居)

山近覺寒早(산근각한조) : 산이 가까워지니 추위가 이름이 느껴지고 

草堂山氣晴(초당산기청) : 초당에 산 기운은 맑기만하구나 

樹凋窓有日(수조창유일) : 나뭇잎 시드니 햇빛 창에 들고 

池滿水無聲(지만수무성) : 못에 물 가득한데 물 소리 들리지 않는구나

菓落見猿過(과락견원과) : 산 과일 떨어져 원숭이 지나는 게 보이고

葉乾聞鹿行(엽건문록행) : 나뭇잎 다 말라 사슴 다니는 소리 들리는구나

素琴機慮靜(소금기려정) : 줄 없는 금을 잡으니 온갖 잡생각 고요해지고

空伴夜泉淸(공반야천청) : 텅 빈 하늘 벗 삼으니 밤의 샘물 소리 맑기만 하구나

 

※ 가만히 앉아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기에는 시인의 마음이 지나치게 조급하였다. 그래서 산속으로 직접 들어가 가을맞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산속은 가을이 빨리 오기 때문이다. 가을을 곧 만나리라는 기대감으로 인한 설렘을 가슴에 가득 품고 시인은 길을 나섰다. 산에 가까웠을 뿐, 아직 산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을이 느껴진다. 서늘한 가을의 날씨가 때 이르게 산속에 도착했음을 예감한다. 마침내 산속 초당에 다다르자,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초당 주변의 산 기운이 맑게 갠 모습이었는데, 이는 조물주가 가을에게만 허락한 특전(特典)이었던 것이다. 혹시 가을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은 시인의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시인에게 남은 일은, 편안한 마음으로 가을의 이모저모를 느긋하게 즐기는 일뿐이다. 맨 먼저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창 옆의 나무였다. 한여름에 무성한 잎으로 창에 해를 가려주었던 그 나무였건만, 이제 듬성듬성 해진 나뭇잎 새로 창에 해가 들어와 있다. 가을이 왔음을 에둘러 표현한 시인의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시인의 눈은 자연스레 마당으로 옮겨갔다. 연못에 물이 가득하건만, 물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한여름 같았으면 비바람에 물소리가 요란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가을이 와서 바람이 멎은 탓이다. 가을이 온 것은 초당 밖도 마찬가지였다. 산 과일 나무에 열매마저 떨어지고 나니 원숭이 지나가는 모습이 초당 안에서도 훤히 보이고, 낙엽이 바짝 말라 사슴 지나는 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가을이 깊어진 것이다. 가을의 정취에 취한 시인은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방 한 켠에 놓아두었던 줄 없는 금(琴)을 끌어당겨 만지노라니, 마음 속 온갖 잡생각들이 쥐 죽은 듯 멎어 버린다. 여기에 텅 빈 하늘을 �!構� 누우니 어디선가 밤의 샘물 소리가 맑게 들려온다.  

가을을 빨리 만나고 싶다면 산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곳엔 한걸음 빨리 온 가을의 정취가 가득 차려져 있다. 사람들은 들어가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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