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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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가는 길(윤선도 삶의 시대적 배경)
원래 윤선도(尹善道)는 서울 연지동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인가 여덟 살 때에 해남으로 양자를 와서 지냈다고 한다. 한창 어리광을 피울 나이에 생부모와 떨어져 살아야하는 슬픔을 어린 윤선도는 마을 뒤의 두륜봉에 올라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살다간 시기는 나라 안으로는 당파싸움이 치열했고, 나라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가 잇달아 쳐들어옴으로써 나라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던 시대였다고 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했던 인조반정 때에 서인이 공을 세웠던 것이 계기가 되어 효종, 현종 때에도 줄곧 서인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터라 남인의 세력 하에 있었던 윤 고산은 정치싸움에서 난처한 경우를 당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 정치싸움의 곡절로는 이 나라 당파싸움의 어처구니없음을 지적할 때에 곧잘 들먹여지는 효종의 '산릉문제'와 조대비의 '복상문제' 같은 것도 끼여 있을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윤선도에게서 문학을 배웠고, 그 때문에 서인의 등살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껴왔던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효종의 무덤을 쓰는 문제와 조 대비의 복상문제를 두고 서인이었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일파와 입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다 마침내는 함경도의 북쪽에 있는 삼수에 귀양을 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과 더욱 견딜 수 없는 파벌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윤 고산은 고독함과 삶의 회의를 느끼며 그 돌파구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삼수귀양보다도 훨씬 전인 인조 때의 일이긴 하나 윤선도가 이곳 보길도에 와서 살게 되는 한 원인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 윤 고산은 성산현감을 버리고 , 향리 남해에 내려와 기거하고 있을 때였는데,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으로, 그리고 왕손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은 강화도(옛이름=江都)로 피란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윤 고산은 해남지방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갔으나, 그 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말았었다.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그는 인조대왕이 청나라 태종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차 있는 고산 윤선도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시고 있을 적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또한 여지껏 당파싸움에 삶의 허무를 느끼며 있는 터라 두 번 다시 이 세상을 보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고 한다.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에 이르렀을 즈음 풍랑을 만나 그 섬의 황원포에 잠시 정박을 하게 되었고, 이때에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마음을 사로잡힌 윤선도는 제주도로 갈 것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이 섬을 보고 '차지(此地)가 승어제주(勝於濟州)라'하여 이곳 동면(洞名)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정치싸움에서 찢어지고 멍든 마음을 자연과 더불어 풍류로써 달랜 듯하다. 고산연보에 의하면 이곳에 온 때가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가 51세였다고 한다.

고산은 부용동 바위틈에서 샘솟는 맑은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어 그 연못 가운데는 작은 섬을 만들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 놓았고, 그 둘레에 작은 정자를 세워 세연정(洗然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며, 현재의 세연정은 고증을 통하여 허물어 없어진 것을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세연정은 우리나라 조경유적 중 가장 특이한 곳으로 윤선도의 기발한 착상이 잘 표현되어져 있다고 한다.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할 수 있으며, 또한 윤고산 문학의 대표작품인 어부사시사가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창작되었다하니 세연정 정원은 문학 유적지로 그 의미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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