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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 승인 2014.09.0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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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CT라 불리는 이 트레일은 남쪽의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출발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를 관통하고 북쪽의 캐나다 국경지대에서 끝난다. 나에겐 이름마저 생소한 이 길을 26살의 셰릴은 자신을 위해 걷기 시작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삶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셰릴에게 PCT는 치유였고, 자신이었다.

계획과 달리 처음에는 느리고 무척 힘이 들었지만 오리건주에 다가갈수록 그녀는 달라졌다. 자신보다 더 무거웠던 배낭의 무게가 가벼워질수록 그녀는 강해졌다. 엉겨 붙어 곪은 상처와 지난날의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어쩌면‘PCT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처럼 그녀를 보면 도와주고 싶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제주 여행 중 그 동안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한라산이 궁금해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아이젠 없이 갈 수 없다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입구에 위치한 매점에서 주머니에 든 현금 전부와 무언가 허술해 보이는 아이젠 한 쌍과 바꾸었다. 가장 완만하지만 가장 길다는 성판악 코스에 들어서는 순간, 무릎 높이까지 쌓인 순백의 절경과 함께라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자신감에 젖어들었다.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또 다시 오르고, 눈길은 미끄럽고 갈증에 힘이 들었지만 이 눈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했다. 더욱이 진달래밭 대피소에서는 컵라면을 먹어야 한다며 2000원을 건네주던 아저씨. 한 모금 마셨다며 생수 한 통을 건네주던 아주머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나눔 덕분에 한라산의 품속에서 뿌듯한 행복을 만끽했다. 언젠간 꼭 다시 만나고 싶은 한라산의 겨울, 싸구려 아이젠 하나만 믿고 겨울 산에 오른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몇 해가 흘렀지만 나는 아직 겁쟁이다. 어둠이 무섭고 나에게 달려드는 여름밤의 벌레들이 싫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상과 기억들이다. 뉴스, 영화에서 보았단 잔인한 사건들, 사춘기 시절 겪고 싶지 않았던 징그러운 손길의 두려움들이 어둠 속에 혼자 있을 때면 수시로 날 괴롭힌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과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셰릴처럼 산 속에서 잠을 자고 먹고 걷는 것은 어쩜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알려주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날 괴롭히는 상처와 두려움을 꽁꽁 안고 있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처음 시작은 힘들더라도 걸음마다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그러면 그 속에 웅크려 있는 순수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의지와 용기,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그녀처럼 온전한 나만의 시간,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급하다. 그랬다. 읽는 내내 당장이라도 걷고 싶었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이 아까울 만큼 다급해졌다. 무작정 걷다보면 내 마음 시원해질까 싶어 배낭 하나에 신발 끈 질끈 묶고 걷고 싶었다. 도서 ‘wild’(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나무의 철학)의 550페이지를 한 자리에서 읽어내려 갈 만큼.

책장을 덮고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자리에서 어제와 다름없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막상 신발을 신으려니 하루 이틀이 지나고 그 다음날이 되면 묵묵히 내 손을 잡고 걸어줄 사람이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 걷지 못하고 있다. 대신 오늘도 거울 속의 나를 한참을 자세히 바라본다. 그리고 싱긋 웃어본다. 그래, 저기 보이는 거울 속의 저 여자가 나, 싱긋 웃고 있는 거울 속의 사람이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만들어갈 나일 테니 오늘도 조금 더 힘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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