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상념
초가을 상념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8.2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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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이 여름과 가장 다른 것은 아마도 빛깔일 것이다. 같은 빛깔일지라도 한층 맑고 투명한 것이 가을 빛이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세월의 흐름이 선명히 보이는 지도 모른다. 눈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세월의 흐름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우수(憂愁)와 상념(想念)에 빠져들곤 한다. 남송(南宋)의 시인 문천상(文天祥)에게도 가을은 애틋한 정을 북돋우는 계절이었다.



◈ 초가을(早秋)

隻影飄零天一涯(척영표령천일애) : 외로운 그림자는 하늘 가를 떠다니며

千秋搖落亦何之(천추요락역하지) : 천추에 흔들려 떨어져 또한 어디로 가려나

朝看帶緩方嫌瘦(조간대완방혐수) : 아침에 보니 허리띠 느슨해져 이제는 수척해짐이 싫고

夜怯衾單始覺衰(야겁금단시각쇠) : 밤에는 홑이부자리 두려워지니 비로소 노쇠함을 깨닫네

眼裡游從驚死別(안리유종경사별) : 눈에 선한 친구들은 죽어서 이별함에 놀라고

夢中兒女慰生離(몽중아녀위생리) : 꿈 속에서 아녀자들에게 살아서 이별함을 위로하였다네

六朝無限江山在(육조무한강산재) : 육조에 무궁토록 강산은 그대로 있으니

搔首斜陽獨立時(소수사양독립시) : 석양에 머리를 긁으며 홀로 서 있는 때이로다



※ 시인은 자신이 그저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를 시작한다. 자신의 몸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말투에는 이미 외로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거기다가 시인은 떠돌이 신세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하늘 가를 바람처럼 떠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시인이 외톨이에 떠돌이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을이 천 번이나 돌아 온 것처럼 느낄 만큼 시인의 인생길은 길고도 험난하건만, 지금도 여전히 갈 곳이 어디인 줄을 모른다. 시인의 떠돌이 신세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다만 자각(自覺)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인의 자각을 일깨운 것은 바로 가을 느낌이다. 부쩍 차가와진 바람, 이미 흩날리기 시작한 낙엽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세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번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자, 늘 함께 떠돌아 눈에 선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난 사실에 깜짝 놀라고, 꿈속에서나마 아버지와 생이별한 어린 자식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등 서글픈 상념이 이어진다. 여섯 왕조가 빠뀌었어도 강산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이 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며 홀로 서 있을 뿐인 시인의 모습은 쓸쓸함을 넘어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지는 해, 듬성듬성해진 머리카락, 홀로 서 있는 시인 자신은 결국 쓸쓸함과 허무함을 극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사람들이 유독 가을에 쓸쓸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가움이라든가 스산함과 같은 환경적 요인이 사람의 쓸쓸한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견해일 뿐이고, 그 이면에는 세월무상과 인생무상에 대한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같은 세월이라도 한 해의 앞부분인 봄과 여름 보다는 뒷부분의 시작인 가을에 인생의 덧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렬해진다. 인생무상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수만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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