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받는 교권(敎權)·추락하는 교권(敎權)
추앙받는 교권(敎權)·추락하는 교권(敎權)
  • 이상준 <음성교육지원청 교육장>
  • 승인 2014.08.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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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상준 <음성교육지원청 교육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우리나라를 다녀가셨다. 교황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한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냈고 먼발치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각자 마음속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기대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동안 함께 어울려 살던 우리의 수많은 이웃들이 그렇게도 억울하고 슬프고 한 맺힌 이웃들이었던가?

마치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온갖 피해를 당하다가 아버지가 나타나자 저 나쁜 개구쟁이를 혼내달라고 하소연하는 마음 여린 소년들 같았다. 압박과 설움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눌려 지내던 약소민족이 하느님께 하소연이라도 하듯 몰려나온 모습들이었다.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을 비롯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해온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송전탑 건설을 죽기로 막아온 밀양 주민들, 용산 참사 피해자, 다문화 가족과 새터민, 납북자 가족, 장애인 등등.

그동안 이들을 우리가 서로 보듬어 주고 슬픔을 감싸 안아야 했거늘 우리 사회는 소통과 화합과 협력을 말로만 부르짖었을 뿐 이들의 가슴에까지는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려는 위정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신뢰가 무너져 상처를 주고 불평과 원망만 늘어나게 한 것일까!

우리 식구를 우리가 감싸주지 못하여 남에게 하소연하게 만든 우리 자신이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한국 국민 모두의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한이 뭉쳐 응어리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우리에게 소통과 화해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선물로 주고 가셨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부모님과 스승님, 나라님에게는 군사부일체라하여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따르고 존경하는 좋은 전통을 지녀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부모를 무시하고 스승을 멸시하며 나라님을 막 대하는 좋지 않은 풍조를 마치 민주주의의 특권인 양 자유와 평등의 필수 조건인 것처럼 권장하고 강요해오고 있다.

종교에서의 믿음이란 무조건적이요 의심하지 않는 것일진대, 교황의 교권(敎權)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종교가 설립할 수 없기에 당연한 것인데도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옛날 전제주의 왕권시대에 왕의 권위가 필요했던 이유도 바로 백성들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공경의 대상으로 존재해야만 백성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천주교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요 상징적 존재이듯이 국민들은 스스로 나라님을 그렇게 만들어야 나라님으로서의 존재의 이유가 되고 또 기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같은 교권(敎權)이지만 교육에서 교사의 권위를 만들어주는 것은 교육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에 예로부터 임금도 세자의 스승에게는 깍듯이 예를 표했다. 종교에서 교황의 교권(敎權)이 필요한 것처럼 교육에서의 교권(敎權)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 설 때 온 국민이 교황 방문 때처럼 믿고 따르고 공경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대통령은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욱 커져서 국민들이 기대하는 바에 부응하고 국민들을 감싸 안는 공경받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몇 십년만에 한번 오는 교황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아도 매일 볼 수 있는 우리의 대통령, 정치가들이 국민들에게 늘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아울러 학교의 스승님들이 학생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존재가 되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참다운 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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