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같은 잠꼬대
詩같은 잠꼬대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08.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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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항아리 가득 하늘 좀 담아 줘”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내가 어젯밤에 한 잠꼬대라며 들려준다. 잠꼬대가 신기해서 머리맡에 적어놨는데 기네스북에 올릴 특종이라며 놀린다. 꿈은 소망충족이라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면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할까

파편처럼 날린 잠꼬대는 전날 있었던 행위가 퍼즐처럼 뒤엉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 항아리에 쟁여둔 매실장아찌를 건져 유리병에 옮겨 냉장 보관하고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한쪽에 두고는 잠시 잔뜩 구름낀 하늘을 올려다본 일 외에는….

무의식은 내면에 자리한 욕망과 본능의 저장소로 꿈을 통해서는 은유나 환유로 표현되는데 아마도 맑게 갠 날씨를 소망하는 무의식의 표출인 듯싶다. 의식의 그림자까지 감수하는 세밀한 대뇌 앞에 아연실색이다.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 수많은 감시망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저 심연까지 도덕적으로 단단히 도포하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꿈과 무의식이 상관관계를 이룬다면 태몽은 어떨까

밤하늘의 달에 관한 나의 태몽은 한 편의 그림동화다.

어머니가 캄캄한 언덕마루를 더듬거리며 오를 때 갑자기 하늘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보름달이 쏙 나오더란다.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외조부는 잘 가르치면 큰 인물이 될 텐데 아들이 아니라 아쉽다고 하셨단다.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했던 시대여서 나 또한 아들 귀남의 그림자에 가린 후남이로 ‘나 홀로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태몽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볼 때마다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태몽의 무의식인지, 별 총총히 빛나고 달무리 동화처럼 퍼지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유년시절에도 모깃불 피운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이슬에 옷이 다 젖도록 하늘 삼매경일 때가 많았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각각의 달의 모양 속에서도 언제나 내게 달은 아홉 살 가량 되는 소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떤 때는 웃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우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검은 부분이 많을 때는 침울한 표정으로 느껴졌고 흰 부분이 많을 때는 해맑은 표정으로 느껴져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달콤하게 만들었다.

과학시간에 달의 고지는 화강암류로 밝게 보이고 바다는 현무암류로 어둡게 보인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까지 달은 내게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을 지닌 미소년이었다. 그 동화 같은 시나리오는 해= 불, 남자, 달= 물, 여자라는 태극의 원리를 알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가슴이 없는 과학적인 지식들이 동화 같은 어린 낭만을 포박하여 절망하게 했지만 그 이후로도 아르테미스는 이성의 동굴까지 찾아와 감성의 물기를 흠뻑 적셔 놓았다.

지금까지 늘 무의식으로 따라붙던 보름달의 정령, 어쩌면 어제 둥그런 항아리를 오래도록 닦던 일은 하나의 의식행위였는지도 모른다. 항아리 가득 하늘을 담고 싶은 소망이라면 항아리의 원형은 보름달을 소망하는 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보름달은 내 심연 속 무의식을 유영하는 이루지 못한 꿈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이 들어앉기 전에 만난 미소년에 대한 그리움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 항아리를 음, 하늘을 양으로 보고 과도한 꿈 해석을 내놓는다면 눈총 받을 일이다. 그나저나 날것으로 톡톡 튀는 무의식 단속도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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