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시대와 여성 상위
술 권하는 시대와 여성 상위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4.08.05 2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약간의 감정을 섞은 말을 들었습니다. “술을 먹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을 거면 뭐 하러 이 자리에 나왔는데!” 여럿도 아니고 넷이 한 상에 앉은 탓에 머쓱한 내 표정 못지않게 분위기가 싸-했지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좋은 마무리를 하자는 분위기를 깨면 안 되겠다 싶어, “차를 가져 왔으니, 따라 나 드리지요.”라며 밥을 먹자니, 마음은 이미 실수로 밟힌 똥냄새로 구리고 난 뒤입니다. 그런데 나의 의도가 섭섭했거나 빈정 상했던 것일까요. “여자가 술을 따르는 것을 마치 남성이 주는 성적 수치로 생각하는 게 문제예요.”라는 질책의 말씀에 이번엔 내가 빈정이 상합니다. “여자 상위 시대가 된 지 얼마나 되었는데 술좌석에서 술이나 따르며 곁을 지켜주는 사람 정도로 취급하는 게 문제지요. 이 시대 대통령도 여자고 각 나라의 여성 지도자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린 것은, 연세나 직위 사회적 명망이 까마득한 분이라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아직도 한참 멀었습니다. 나이. 직위. 명망을 떠나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당당한 여성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래도 바른말 한다고 내심 자신하던 위세는 허세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십여 년 전 어느 날도 그랬습니다. 문단의 까마득한 선배님께서 사람들 많은 회식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와서 한 잔 따라라.” 하는데 예전이라고 까칠함이 다르지 않았던 저는 공손하게 목례를 하고 긴 줄 끝에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쌩하니 일어섰습니다. 당시 좌중이 모두 머쓱해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술 따르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잊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꽤 오랜 후 몇 년이 흐른 뒤에 우연히 그분을 뵈었는데,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더군요. “그때 미안했노라고.”

결국, 산다는 것은 저마다의 삶의 흔적을 마음에 남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미모로, 지식으로, 재주로, 연민으로, 저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만 그것들은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사라지며 모래처럼 흩어져 가지요. 그러나 미움이든 사랑이든 분노이던 간에 누군가를 울린 감정이란, 문신처럼 새겨진 것이 아닐지라도 가슴에 남고 영혼에 담기는 겁니다. 몇 년이란 꽤 오랜 시간 후에도 지워지지 않다가 그러다가 그것이 바람에 실려 빗줄기를 타고 햇살을 따라 다시금 인연이 되면, 그때 다시 매듭을 짓거나 풀면서 삶의 기쁨이 되는 것이겠지요. 미소로 인사했을 저에게 “그때 미안했노라”했던 새하얀 노인의 환한 안색이 아직도 선연한데, 저도 이제 늘어나는 허릿살 못지않게 까칠함을 벗어날 나이가 되긴 됐는데요. TV에서 남성연예인들이 치마 입고 스타킹 신는 것만 보고도, 여성을 따라하거나 여성을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아직도 여성을 조롱하는 남성들에게 날리는 강한 펀치만 같아서, 여성이란 자격지심이 위로받는 못난이입니다. 그래도 많은 여성이 가정의 경제권을 쥐락펴락하는 시대에, 여성의 취업률이 남성을 앞질러가는 이 시대에, 습관처럼 여성에게 술 권하는 남성들은 한 번쯤 재고해 볼 일입니다.

아무려나,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는 듯 기세등등 아내를 종 부리 듯 하는 남자랑 살면서 저는 입만 살아서 동동거립니다. 하기야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고 했으니. 전설의 양반가 종가며느리, 고루한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라곤 지아빌 하늘처럼 떠받들고 마음은 온 가족의 풍요가 되며 조상의 제사를 각별한 정성으로 모시는 것이었으니, 다행히 제사야 내 차지가 아니기에 적당히 한다지만 지아비에게 큰소리 내면 벼락을 맞을 일이라 했으니, 보고 들은 잠재교육 속에서 저는 아직도 여성 상위가 필요한 시절 늦은 여성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