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08.0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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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이른 아침 길을 나선다. 일찍부터 출근차량으로 밀리는 시내 병목지점을 벗어나 시외로 들어서면 녹음이 시원하다. 엷은 안갯속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며 푸른 숨을 깨우는 길. 살피꽃밭 키 작은 칸나와 서광 맨드라미들이 다정하고 평화롭다.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인다. 마리아 앤더슨의 ‘깊은 강’이 흐른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노래, 독특한 콘트랄드 저음이 마음 갈피마다 진한 무늬를 그린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에는 고단했던 삶이 묻어 있다.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기로 했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 취소를 통고받자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야외 연주로 항의했던 그녀. 인종차별과 싸우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기에 그녀가 부르는 흑인 영가는 고통을 풀어내는 고백이며 저항이다.

그녀의 노래가 끝날 즈음 갑자기 거센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정신없이 좌우로 빗물을 쓸어내리는 사이 시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어지럽다. 고속으로 달리던 차들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서행을 한다. 나의 시간도 그 흐름에 맞추어 천천히 흐른다.

물안개에 젖은 풍경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수묵화를 그리는데 경계 밖 다른 세상인 듯 달맞이꽃만이 환하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희망의 이정표처럼 빗속에 젖고 있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지상의 분노를 품어주다 더는 참을 수 없는 하늘이 쏟아 붓는 물줄기. 하늘의 고통과 꽃의 고통이 만나 그려내는 하모니가 마리아 앤더슨의 노래만큼이나 당당하고 아름답다.

안도현 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노래했다.

바깥으로 뱉어 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중략)…꽃대는/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중략)…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안에 가득 고인 피/뱉을 수도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꽃은 핀다/

세상에 고통 없이 생겨난 것이 있을까?

마리아 앤더슨의 고통은 노래가 되었고 꽃으로 피어난 고통은 달디단 열매를 맺는다. 사람의 고통은 밖으로 나오면 무엇이 될까? 자고 일어나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의 신음 소리. 발버둥치다 담아두기 고통스러워 절로 흐르는 피. 곪은 상처들이 지뢰처럼 터지며 지구촌은 절규로 가득하다. 고통스럽다.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에게도 아픔이 새로운 세상의 꽃으로 피는 시간이 올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이 구름 걷히며 햇빛이 쏟아졌다. 들판에서 강렬한 빛들이 튕겨 오른다. 물꽃 핀 듯 눈부시다. 서서히 차들이 속도를 높인다. 물을 가르며 덤프트럭이 고속으로 앞서 간다. 눈앞이 어두워지며 휘청 차가 흔들린다. 달맞이꽃도 나도 허리를 꼿꼿하게 편다. ‘깊은 강이여. 나는 그곳을 넘어서 가리니~’를 중얼거리며 액셀을 밟는다. 바퀴에서 전해지는 물 가름 소리가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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