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시간
두 개의 시간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4.08.0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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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우리 집에는 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 1년 전 큰아이가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떠났다. 보내고 나서 시차가 나는 아이의 시간을 가늠해보느라 손가락으로 7시간을 꼽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사가지고 들어왔다. 하나는 안방 시계 옆에 또 하나는 거실 시계 옆에 나란히 놓였다. 그 시계를 보면서 ‘지금쯤은 일어났겠구나, 학교에 갔겠구나, 혹은 밥을 먹는 중이겠구나’ 라고 헤아리면서 일 년을 보냈다. 이제 아이는 다음 달이면 귀국한다. 옆의 지인들은 어느새 일 년이 된 거냐고,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 일 년은 참으로 더디게 지나갔다.

아이가 없는 일 년 동안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났고 지난 3월 중국행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인도양 남부에 떨어져 탑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한 전원이 행방불명됐다. 이달 17일에는 역시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우크라이나 분쟁지역 근처를 지나다 미사일에 격추되는 사건으로 전원 사망했다. 이어 타이완의 소형항공기가 비상착륙을 시도하다 많은 목숨을 또 잃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생각이 많다. 애타는 부모들의 눈물 영상을 볼 때마다 멀리 나가 있는 아이 걱정으로 잠을 설치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기다릴 사람들을 잃은 그들과는 달리 2개의 시계를 놓고 안부를 걱정할 자식이 있다는 게 참으로 귀한 행복임을 알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어디 만큼 왔나’ 하는 놀이를 좋아했다. 막내로 자란 탓에 혼자서 집을 보는 일이 많았다. 지금 같으면 대문을 잠그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대문이 흔치 않아서 가족 중 누군가는 집을 보고 있어야 했다. 또 어려운 시절이라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조마조마하며 집을 봤다. 마당가득 곡식을 널어 말려두기라도 하면 더 불안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를 기다리면서 ‘어디만큼’을 되뇌었다. 눈을 감고 엄마가 머물러 계실 출발지부터 ‘어디 만큼 왔나?’ ‘어디만큼 왔지’ 하고 스스로 답하고는 했다. 반복하고 나면 시간이 제법 지났고 반가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요즈음 ‘어디 만큼 왔나’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며칠 전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는 팽목항의 부모들 뉴스를 보고 나니 마음이 착잡하고 답답했다. 나는 두 개의 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시계는 4월 16일에 멈춰 100여 일을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이 너무 아파 세월호 아이들의 동영상 목소리가 나오면 음소거를 눌러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다음날 인터넷에서 기사를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100일이 넘은 지금까지 나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부모는 오죽하겠는가? 자식의 일이라면 목숨도 내어놓을 사람들이 부모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자식을 어찌 잊으랴. 그렇더라도 따라 죽을 수는 없기에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도 사는 게 아닐 부모들의 일상은 안 봐도 보는 듯하다. 운명의 그날부로 멈춘 시계의 태엽을 되감을 사람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복이 있음을 생각하니 고마운 일이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일상이 깨지면 고통 속에 사는 일이 의외로 많다. 하물며 자식을 잃은 엄마는 오죽하겠는가. 자기 자식을 잃은 공허함을 세상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너무 깊고 복원될 수 없는 상처 앞에 시계는 벌써 무의미해졌어도 아들 혹은 딸이 살아온 추억의 시간을 거슬러가면서 되감을 수 있는 힘이라도 생기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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