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무릎을 보라
그대여 무릎을 보라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4.07.31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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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금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무릎은 경건의 대명사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는다. 옷깃을 여미며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신을 낮추거나, 비우거나, 내려놓는다는 상징적 의례다.

절대자에게 귀의할 때도, 자신의 죄를 고할 때도, 간절한 소망을 빌 때도, 그렇게 무릎을 꿇는다. 스스로 무릎 꿇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무릎 꿇어본 이는 안다. 바로 그때 힐링되고 치유되고 충전되고 새털처럼 가벼워진다는 것을.

세상에는 원치 않는, 죽기보다도 싫은 무릎꿇림도 있다.

싸움에 져 항복하거나, 힘에 굴복당하면 어쩔 수 없이 무릎 꿇어야 한다. 타의에 의해 무릎 꿇리는 것이다.

그런 무릎 꿇음을 당한 이는 안다. 무릎 꿇는 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복수에 불타게 하는 지를.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무릎 꿇기 싫어 서서 세수했고, 민영환과 민영익은 자결을 했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불의 앞에 무릎 꿇고, 거대자본과 권력에 무릎 꿇는다.

한번 무릎을 꿇었다고 영원한 패자가 아니다. 훗날을 도모하려면 살아남아야 하고, 속울음을 울더라도 무릎 꿇음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불의와 거대자본에 무릎 꿇은 후 권토중래하는 이는 아름답고 가치 있다.

살다보면 무릎 칠 때도 있다.

사람들은 갑자기 어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 또는 몹시 기쁠 때 무릎을 탁 친다.

왜 그 많은 신체부위 중에 굳이 무릎을 치는 이유는 손바닥과 무릎의 상관관계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몹시 기뻐서 무릎을 칠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보혁 갈등과 좌우대립, 청년실업과 경기침체, 가족해체와 고독사, 황금만능주의와 일등지상주의 그리고 세월호 침몰, 임 병장 총기난사, 묻지 마 범죄 등 어수선한 세상살이에 지칠 대로 지친 현대인들이다.

그러므로 무릎에 피멍이 들어도 좋으니 기상천외한 일이든, 기쁜 소식이든, 좋은 일로 무릎 칠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무릎은 마주 하라고 있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 서로 가까이 마주 앉는다. 그렇게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하면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다.

남과 북도, 여야도, 철천지원수도, 무릎을 맞대면 오해와 증오의 실타래가 풀어지고, 화해와 상생의 길이 열린다.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인해서 당신의 삶이 미편하다면, 당신 무릎을 먼저 그 사람 앞에 내어 놓아야 한다.

망설이지도, 주저하지도 말고, 그대가 먼저 다가가 무릎을 꿇으라. 나를 죽이면 상대도 살고 나도 산다. 그게 상생의 원리다.

인간이 태어나 맨 처음 자력으로 움직일 때 무릎이 사용된다.

무릎으로 기어서 엄마에게 가기도 하고, 장난감을 집으러 가기도 한다. 그 무릎이 지금 고장 나고 있다.

너무 많이 써서 망가지고, 너무 쓰지 않아 약해진다. 무리한 운동으로 무릎을 혹사시키거나, 500m 거리에 있는 약국도 걷기 싫어 차를 타고 가는 세태이니 무릎이 고장 나고 약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무릎의 퇴행은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

직립보행 인간이 잘 걷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그러므로 무릎도 잘 관리하고 보호해야 한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생명의 원천이 있다. 바로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청춘과 늙음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사랑과 증오가 나온다.

오늘 새삼 그 무릎을 응시한다.

그대도 한번쯤 그대 무릎에 안부를 묻고, 그대 삶을 조용히 반추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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