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백영호
작곡가 백영호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4.07.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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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한국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작곡가 백영호의 음반 2개가 그의 아들 백경권에 의해 출시됐다.

‘백영호 추모 10주기 기념 음반’과 ‘동백 아가씨 50주년 기념 백영호 작곡집’이다.

추모 음반에는 동백 아가씨, 애수의 소야곡, 마음의 자유천지 등 23곡을 담았다. 50주년 작곡 집엔 동백 아가씨, 못잊을 부르스, 여로 등 21곡을 실었다.

이번 음반에는 백영호가 작곡한 불후의 명곡들이 들어 있으며, 근·현대의 유명 가수들이 부른 노래에서 지나간 가요 역사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백영호는 1920년 8월 부산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독학으로 익힌 기타 실력으로 부산과 목포, 광주 등지에서 연예활동을 했다.

그는 48년 목포에서 고향으로 가는 뱃머리에서 ‘고향 아닌 고향’을 작곡하고 코로나레코드사에서 데뷔했다. 6년 후 부산에 있는 미도파레코드사에서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부친의 도움 아래 당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가수 남인수, 백설희, 현인, 손인호을 만난다. 그 가수들을 통해 추억의 소야곡, 나의 쥬리엣, 잘있거라 고모령 등을 발표해 부산을 일약 한국 대중음악의 메카로 만들었다.

그 후 미도파레코드사 후신인 지구레코드사에서 동백 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20대의 무명에 가까운 이미자를 스타덤에 오르며 작곡가 백영호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동백 아가씨는 처음 서울시내 다방과 음악감상실 등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라디오방송에서 1년 내내  흘러나왔다. 동시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모든 계층의 국민애창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2백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 실적을 쌓은 동백 아가씨는 1966년 뚜렷한 근거 없이 왜색가요라는 이름으로 금지곡이 되어 무려 21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곁에서 사라졌었다.

그럼에도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백영호는 연이은 히트곡 양산으로 과히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이때 나온 가요가 아씨, 추풍령, 동숙의 노래,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이다.

가요사에서 사라지는가 했던 동백 아가씨가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해금 되자 백영호와 가수 이미자는 인기 가도를 달렸고, 오래전의 동백 아가씨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불멸의 가요로 이어져 오고 있다.

가사 속에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말처럼 불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동백 아가씨가 지금은 잘 익은 붉은 열매로 영글어진 것이다.

백영호의 대표곡인 동백 아가씨는 국내보다도 외국에서 더 이름을 떨쳤다. 멀리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들, 파월장병을 포함한 재외동포들에게 애국가 이상의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업적을 쌓은 백영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국민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자리 매김하고 있다.

기타연주자인 백영호는 많은 노래 녹음 작업에 직접 연주해 뛰어난 솜씨를 보여줬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2003년 5월 8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이제 그의 아들 백경권이 아버지의 작곡 역사를 착실하게 이어가고 있다. 백경권은 틈틈이 아버지 백영호의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새롭게 조명하고 스스로 만든 박물관에 전시 일반 국민에게 선보이는 등 자신을 각별하게 아끼고 키워준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음악을 오랫동안 기억해 주고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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