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촬영을 하며 여성 상위 시대를 생각하다
누드촬영을 하며 여성 상위 시대를 생각하다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4.07.22 1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익산시 예술의 전당. 셔터 소리가 요란한 누드촬영 현장입니다. 누드를 향해 150여개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양철지붕에 빗방울처럼 쏟아집니다.

누드의 여인은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고 피아노 위에 눕기도 합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양팔로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누드의 허벅지에 그려진 꽃과 나비 한 마리, 행위 예술가가 나와서 향기를 눈으로 보여주려는 듯 반짝이 가루를 손에 올려 입으로 훅 불어 누드에 입힙니다.

포즈에 따라서 피부의 곡선에 비치는 빛의 양감을 놓치지 않으려 작가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합니다. 빛의 양감뿐 아니라 근육의 탄탄한 긴장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누드가 미술과 사진예술로 자리매김한 역사는 이미 오랩니다.

누드촬영을 하며 생각합니다. 맨 처음엔 저렇듯 다 벗은 맨몸으로 태어났는데 계절이나 날씨 때문에 관념이나 풍속이 가져온 의류문화 때문에 몸을 감추고 몸에 상처 입히게 되니 아무것도 안 걸친 인간의 맨몸이 얼마나 완벽한 하느님의 작품인지는 몸을 함부로 하는 시절에서 더욱 절감합니다. 벌거벗은 사람 모두를 누드라 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관념적인 것을 입혀 주었을 때만 누드라고 합니다. 물론 평소엔 옷을 입고 생활하다가 목적이나 의의를 두고 나체가 되었을 경우에 ‘누드’라고 하니 ‘인간의 자유를 외치는 나체족’과도 다르고 ‘보여주고 싶은 자유를 주장하는 노출증’과도 다릅니다. 대부분의 예술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는 저에게 있어 누드화나 누드촬영에 임할 때마다 반복되는 설렘이 커서 이렇게 150여 명의 작가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 함께 하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경험입니다.

누드촬영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치마가 짧아서 팬티를 다 보이며 건널목을 뛰는 여자를 바라보며 한 남성이 “저렇게 입고선 쳐다본다 하고 사진 찍는다 하고 성추행한다고 해요”라며 일갈합니다. 순간 나 역시 치마가 좀 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그녀 입장에서 왜 치마가 길어야 하며 ‘치마 길이가 길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싶은데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사회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라는 결론 때문입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2호선 4호선 환승역 입구에 ‘치마는 가려주세요’라고 쓰인 문구를 보고 남성들은 ‘마치 뒤에서 올라가는 사람 모두를 치한, 변태, 성범죄자로 취급받는 기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항의했고, 여성들은 ‘저런 치마를 입고도 가리질 않으니 경박스러운 여자 아닌가 싶은 ‘답답한 시선으로 옭아맨다며 항의 했었습니다. 남성들이 솔직한 잡담에서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안보이면 더 궁금하고 신비스럽다’했으니 히잡, 차도르, 부르카, 니캅을 쓰는 무슬림이나 인도에서 성폭행이 더 많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일입니다.

누드촬영에 다녀왔다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부끄러운 표정을 짓곤 합니다.

하지만, 셔터소리가 침묵을 다스리는 절제된 감정의 현장에선 외설삽화가 누드예술의 숭고함과 다름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뭣이건 흔하면 식상하니 여성들 노출에도 익숙한 시대는 곧 오겠지요. 남성이 힘의 논리로 발전해 온 역사가 실수한 것이 있다면 여성이 섬세하고 메우는 틈새 발전이 필요하겠지요. 여자가 무지하거나 의무적으로 보호하여야 할 대상이라 여겼던 쓰개치마의 역사를 잊고 여성의 역할이나 위상 제고가 좀 더 필요하단 반증의 갈등을 순하게 받아들이고픈, 아무래도 여성의 누드가 남성의 누드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날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