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그해 여름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07.2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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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어제 저녁 굵은 소낙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내린 단비라 마음까지 흡족하다.

여름 장마철이 되면 내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어디 감추었다 내놓은 물건처럼 노년에 접어들어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집 근처 연자방아 돌판이 있는 도랑에서 작은 빨래를 주로 하셨다. 그럴 때면 빨래방망이를 들고 엄마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그곳에 가면 맑은 물에 손을 담그고 놀 수 있기에 장난감이 없었던 시절 내겐 유일한 낙이었다. 어머니가 빨래하는 동안 난 꽃무늬 고무신을 벗어 물을 채운다. 조약돌과 모래가 깔린 그곳에서 움직이는 모래무지 새끼를 손으로 움켜 넣고 들여다보며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것은 시골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비가 많이 내려 도랑물이 많아졌다. 물이 어느 정도 빠진 후 동네 근처의 봇도랑에서 얼개미로 작은 미꾸라지, 붕어, 송사리도 잡았다. 어느 땐 막 올챙이에서 개구리가 되고 있는 꼬리 달린 작은 개구리들도 얼개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럴 땐 얼른 쏟아 살려주었다. 비가 내리면 물고기 잡는 것이 재미있어 남자 아이들처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렇게 작은 도랑에서 놀다가 차츰 집에서 10여 분 넘게 떨어진 개울로 고기 잡는 장소를 옮겼다.

그때는 막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이라 날씨도 매우 뜨거웠다. 그럴 때마다 시골에서는 개울에서 아이들이 주로 지낸다. 하루는 장마가 그치고 개울물이 불어났다. 물이 많이 내려가면 개울에도 물줄기를 따라 상류까지 물고기들이 거슬러 올라온다. 마을에는 얼개미를 가지고 개울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있었다.

장마가 그치자 개울물이 황토 빛으로 바뀌었다. 황토물에는 얼개미 속에 있는 물고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개울의 양옆 버드나무 아래는 물고기들이 숨어 있고 가끔 물줄기를 따라 그곳으로 올라온다. 그럴 때 얼개미를 물 흐르는 방향으로 놓고 고기잡이를 한다. 물이 맑은 때는 둑에서 가만히 지켜보다 물고기가 올라오면 잡기도 했다. 가져간 무쇠주전자에 피라미 몇 마리와 붕어 한 마리를 잡아넣었다. 개울 둑 아래 물고기가 숨을만한 곳에 얼개미를 대놓고 고무신 신은 발로 구르고 얼개미를 들었다. 이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좀 무거운 듯하여 들어보니 얼개미 안에 뱀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난 얼개미와 주전자를 뿌연 황토물에 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얼마나 급하게 집으로 달려왔는지 고무신 한 짝은 어디로 벗겨져 없어지고 맨발이었다. 정신없이 뛰어오다 넘어져 무릎에 상처도 나 있었다.

부모님은 숨이 차서 헐떡이는 내게 왜 그러느냐 하시며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부모님은 놀란 나를 괜찮다 하시며 찬물을 먹이셨다. 그리고 상처로 피나는 내 무릎에 처마 아래 매달아 두었던 솜처럼 보드라운 지칭개 꽃을 붙여 주셨다.

그일 이후 난 한동안 개울에 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미역 감는다고 풍덩 풍덩 개울에도 잘 뛰어들어 물놀이도 즐기고 고기잡이도 하였지만 뱀에 놀란 가슴을 안고 있는 내겐 그런 것들이 다 그림의 떡이 되었다. 그래서 언덕에 앉아 그 아이들의 노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개울에서 놀란 그 일이 여름이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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