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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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옥 <음성도서관장>
  • 승인 2014.07.1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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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정선옥 <음성도서관장>

삶에도 우기가 있다.

얼마 전 초로의 어르신이 도서관에 오셔서 신문사에 공모할 농촌 생활 수기 원고의 워드 작업을 부탁하셨다.

마침 시간적 여유가 있어 어르신이 원고를 읽고 내가 워드로 입력했다.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시집을 오신 어르신은 궁핍한 살림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온종일 기타만 치는 남편, 그런 아들을 두둔하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견딘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는 설움이 북받치셨는지 목소리가 떨리며 목이 메이신다.

이제는 커다란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남편은 농사일을 열심히 하며, 든든한 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내가 다 뿌듯했다.

어르신의 삶에서 시집살이와 고된 농사일을 견딘 시기는 세차게 내리는 폭우처럼 우기였을 것이다. 우기가 끝난 자리에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곰삭은 상처가 되는 저지대 같은 공간이 있다. 고인 상처는 가슴 한 켠이 아리는 상처가 되어 가끔은 따끔거릴 것이다.

도서 ‘저지대(줌파 라히리 저·마음산책)’는 인도계 미국작가로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이 퓰리처상을 받았고, 보기 드물게 우아하고 침착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은 줌파 라히리의 장편소설이다.

마음의 저지대에 고여 있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두 형제와 그들의 아내였던 한 여자의 이야기이며, 아이까지 이어지는 4대의 삶을 다룬 대하드라마이다. 책 한 권을 읽었는데 마치 연작 장편을 읽은 듯한 긴 여정이었다.

인도 캘커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수바시와 우다얀은 어린 시절을 함께한 형제였지만 성격은 정반대다. 수바시가 맏이답게 차분하고 현실적이라면 우다얀은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자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빈민과 혼란이 거듭된 인도의 현실은 형제의 삶을 상반되게 바꾸어 놓았다.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수바시는 평범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혁명가의 삶을 살게 된 우다얀은 부모가 반대하는 가우리와 결혼을 하고 지하 조직 운동을 하며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결국 우다얀은 부모와 아내가 보는 앞에서 집 근처의 저지대에서 경찰에게 총살을 당한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도에 돌아온 수바시는 부모가 우다얀의 아이를 가진 가우리를 구박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결혼을 하고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가우리는 도피의 수단으로 수바시를 선택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딸 벨라와의 관계도 순탄하지 않다.

결국 가우리는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남겨진 수바시와 벨라는 가우리로 인해 아픈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형과 아내, 딸, 부모의 삶까지 황폐하게 만들었다.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수바시와 가우리의 불안한 삶은 읽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단절된 삶을 살았던 가우리에게 연민도 생긴다. 가우리의 삶을 통해 현재의 내 삶을 투영해 본다.

저지대의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씩 치유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 줄기 빛이 보인다. 수바시도 가우리도, 딸 벨라도 새로운 사랑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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