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4.07.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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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금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식량이 부족해 멀건 죽과 수제비로 연명하던 유년시절, 배는 고팠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울하지도· 불행하지도, 죽고 싶지도 않았다. 더더욱 왕따도, 묻지 마 범죄도, 함께 먹고 자며 보초 서던 전우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비 인륜적 사고도 없었다.

이웃과 함께 오순도순 살았으므로, 외롭거나 절망스럽지 않았고, 증오나 적개심도 별로 없었다. 어른들은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로 친숙하게 지냈고, 애경사나 농사일을 품앗이 하며 서로 돕고 살았다.

아이들도 함께 학교 가고, 숙제도 소꿉장난도 함께 했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머리가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숨바꼭질, 자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를 하며 자랐다.

바람 부는 날은 뒷동산에 올라 바람개비 돌리기와 연날리기를 했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함께 멱을 감고, 겨울에는 개울에서 씽씽 썰매를 지쳤다. 그렇게 함께 놀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꿈을 키웠던 것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동네 어른을 보면 공손히 인사했고, 군 입대하는 청년이 있으면 동네 어귀까지 나와 모두들 한마음으로 몸 성히 돌아오라 축원하며 보냈다. 울타리와 담장은 있었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벽은 없었다. 빈부와 종교 집안 내력이 서로 달랐지만, 그저 한 마을 사람이었고, 모두들 이웃사촌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이런 이웃사촌이 사라져 가고 있다. 울타리와 담장을 경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살 때 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깝게 붙어 살 건만, 왕래는커녕 서로 수인사도 없이 산다.

심지어는 층간 소음 문제로 윗집 아랫집이 칼부림을 하고, 앞집 사는 노인이 고독사를 해도 뉴스를 보고서야 아는 삭막한 사회가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쉬 건널 수 없는 벽이 생긴 것이다. 그 벽으로 인해 서로 불신하고 경계하며, 부자와 빈자가 서로 경원시하고, 지역과 세대와 계층이 대립 갈등하고 반목한다. 모두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각자 외딴 섬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오명이 시사하듯, 남을 배려하고 살피는 어울림의 부재가 공동체의 붕괴를 불러오고 있다.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첫 단추가 바로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관심병사나 정신장애자를 보면, 어릴 때 혼자 어두컴컴한 PC방과 외진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중독된 경험의 소유자였다.

이제 그런 불행한 아이들의 양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밖에 모르는 아이들을 하루 빨리 또래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과 산과 들로, 밝고 환한 열린 공간으로 내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전자게임 등에 빠져 시력도 잃고, 사회성과 사리분별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병든 동심을 복원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놀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휴식하면서 아이들에게 인간의 따뜻한 정과 휴머니즘을 전류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간 불통의 벽· 절망의 벽이 소통의 벽· 희망의 벽으로 바뀔 것인즉. 그러므로 어서 빨리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로 돌아가자. 어릴 때부터 사람과 공동체의 소중함이 몸에 배이게 하는 살아있는 교육,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선의의 경쟁 터, 그게 바로 놀이이고 놀이마당이다.

놀이 속에 상생과 창조의 지혜가 숨어 있나니, 이 땅의 학부모여, 교육자여, 교육당국이여! 우리 아이들을 더 이상 공부벌레로 만들지 말고, 철수와 영희와 마음껏 뛰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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