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농촌의 여름
어느 농촌의 여름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6.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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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한여름 농촌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한가하고 느리다는 것이다. 더위에 지쳐 일을 하기도 힘들지만, 또 딱히 바쁜 일도 없는 편이다. 여름이 아무리 덥더라도, 더우면 더운 대로 다 사는 법이 있게 마련이다. 여름의 한가하고 느릿한 속성에 사람이 맞추어 사는 것이 그 방법이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는 한여름 농촌에서 기거하며, 그 풍광 속에서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있다.



◈ 시골집(渭川田家)

斜光照墟落(사광조허락) : 저녁 햇빛 마을 비추고

窮巷牛羊歸(궁항우양귀) : 외진 골목길로 소와 양 돌아온다

野老念牧童(야로념목동) : 촌 늙은이 목동을 염려해

倚杖候荊扉(의장후형비) : 지팡이에 의지해 사립문에서 기다린다

雉雊麥苗秀(치구맥묘수) : 꿩은 울고 보리 싹은 꽃피고

蠶眠桑葉稀(잠면상엽희) : 누에가 잠들어서 보니 뽕잎이 듬성듬성해졌네

田夫荷鋤至(전부하서지) : 농부는 호미 메고 돌아오며

相見語依依(상견어의의) : 서로 만나면 정담을 나누네

卽此羨閑逸(즉차선한일) : 이를 대하니 한가함이 부러워

悵然歌式微(창연가식미) : 한숨지으며 ‘식미’노래를 불러본다

 

※ 이글거리던 여름 해도 한낮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 기세가 수그러들게 마련이다. 저녁이 되자, 부쩍 비스듬해진 햇빛은 한낮의 위용(威容)은 간데없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마을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이때에 맞추어, 낮 동안 들에 나가 풀을 뜯던 소와 양이, 인적이 드문 외진 마을로 돌아온다.

세속의 번다함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시인은 담담히 여름 풍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사립문에 기대어 서서 목동(牧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을 노인(野老)의 모습이 시인의 눈에 들어왔는데, 목동(牧童)이나 야로(野老)는 그저 자연에 순응해 사는 또 다른 자연일 뿐이다. 느리고 한가롭지만, 생동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꿩이 울고, 보리의 싹이 꽃처럼 피어났다. 누에는 잠들었는데, 뽕잎이 듬성듬성해지도록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고 건강한 생명의 모습 아닌가?

때 묻지 않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되지 않는 농부들은 들일을 마치고, 호미를 메고 마을에 이르러, 서로 만나게 되면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느라 차마 헤어지기 아쉬운 모습이다. 이는 세속의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시인은 한가하고 욕심 없는 여름 농촌의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시경(詩經)의 식미(式微)편을 노래하기에 이른 것이다. 식미(式微)편은 나이가 늙어 감에도 시골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름은 무더워서 지내기가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느리고 한가로운 속성으로 말미암아 바쁘고 복잡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힐링의 계절이기도 하다. 느리면서도 묵묵하게 돌아가는 자연과 생명의 모습에서 인생을 관조(觀照)하며 사는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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