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손
부처손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06.22 18: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저녁나절 옥상에 올랐다.

가뭄이 계속되는 초여름에 단비가 내린다. 부처손이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얼굴을 활짝 폈다. 습기가 부족하면 몸을 최대한 움츠려 생명을 유지한다. 죽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옥상이라 아주 뜨겁다 보니 물을 잘 주어도 그렇게 오므리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럴 땐 지난 시절 내 모습을 보는듯해 쓴웃음이 절로 난다. 나와 10년 넘게 살아 정도 들었다.

오래전 지역교육청에 근무할 때이다. 8월의 매우 뜨거운 여름이었다. 때마침 을지훈련이 있어 밤을 고스란히 지새우고 이튿날 아침 산악회 팀에 합류했다. 남편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조금 염려가 되었다. 내 체력을 알기에 더 그랬다. 사량도 지리망산 산행이었다. 3시간을 지나 통영에 도착했다.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섬의 산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똑딱선을 타고 일행은 산마을 근처에 내려 지리망상 진입로에 들어섰다. 줄 곳 대원들은 가볍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 대열의 일원으로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그러나 금세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했다.

입산 후 30분이 지났을 때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앞서가는 남편을 불렀다. 성급한 남편은 눈이 더 커진다. 그렇다고 다시 배로 가기는 싫었다. 얼마 동안을 대원들 몇몇이 나를 가운데 두고 궁리를 했다. 어른을 업고 갈 수도 없고. 등반대장은 배낭에서 로프를 꺼내 내 허리를 묶고 앞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정인 듯했다. 나는 팔려가는 당나귀 같은 신세가 된 셈이다. 나를 가운데 두고 남편은 뒤에서 밀고 대장은 앞에서 이끌었다. 눈으로 스며드는 땀이 소금기가 있어 따가웠다.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간신히 해발 300m 조금 넘는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일행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모두 한심하다는 눈길처럼 다가왔다. 한참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들은 벌써 점심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피한 생각도 들었지만 아랑곳없이 정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은 우리가 오자 하산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가져간 김밥을 꺼내 허기를 채웠다. 그때 비로소 몸의 피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물을 잔뜩 들이켜고 나니 좀 정신이 들고 힘이 났다. 하산하는 동안 앞, 옆, 그리고 먼 곳의 풍경이 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리를 떨며 땅만 쳐다보고 오르던 오전과는 달랐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등산로 주변을 살폈다. 깎아지른 듯한 비위 틈새에 초록빛 부처손이 정겹게 나를 바라본다. 내 눈에 생기가 돌았다. 데려가고 싶어 작은 것 한 포기를 채취했다. 고생한 사량도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부처손은 나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우리 집까지 동행했다. 둥근 화분에 화산 석을 넣어 부처손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어쩌다 물을 주지 못하면 초록빛 잔가지처럼 뻗은 잎을 있는 대로 오므려 공처럼 몸을 만든다. 처음엔 병이나 죽은 줄 알았다. 화분을 보니 흙이 말라 수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도 함께 지내며 터득한 것이다.

그때 포기하고 그냥 배를 타고 돌아왔다면 부처손은 나와 함께 살지 못했겠지. 내 나이가 더해진 것처럼 묵은 부처손의 언저리에 가족들도 많아졌다. 옥상의 따가운 햇볕이 그때 사량도의 햇빛처럼 정다운지 해풍은 없지만 오순도순 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