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 봉숭아를 심은 뜻은(2)
울 밑에 봉숭아를 심은 뜻은(2)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06.15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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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빛과 그늘을 적절히 이용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처마의 깊이에서도 알 수 있다. 깊은 처마는 그늘을 만들어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열을 차단하고 겨울엔 낮게 뜬 태양이 방안 깊숙이까지 들어 집안을 따뜻하게 했다.

또 적당한 빛의 조절과 통풍을 위하여 우리는 문에 창호지를 바른다.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누구나 문살의 아름다운 무늬를감상할 수 있게, 창호지를 안쪽에 바르는 우리와 달리 일본은 바깥쪽에 바른다. 나와 남이 함께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주거문화를 펼쳤던 것이다.

조선시대 때 만 해도 평민들이 가장 많이 짓고 살았던 초가집 마당은 한 집안의 박물관과도 같았다. 지금은 혼례를 결혼식장에서 치르고 장례식도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아이들이 뛰어놀면 놀이마당이 되었고, 결혼식도 장례식도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마당에서 치렀다. 그리고 평민집 뒤란은 보편적으로 널찍했다고 한다. 뒤란의 텃밭은 화초나 채소를 심고 가꾸며 시부모를 모두 모시고 살았던 그 시절, 며느리의 복잡한 감정을 치유하는 장소로는 그만이 아니었나 싶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쌓이는 울분이나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란은 며느리 혼자만의 공간이며 치유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평민집 뒤란이 널찍하게 만들어진데 비해, 양반집의 뒤란에는 사당을 지어 조상을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끼니때가 되면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는 또 얼마나 정겨웠던가. 먹을 게 그리 흔치않던 시절,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집도 있을 것이라는 걸 배려하여 일부러 굴뚝을 낮게 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의 굴뚝이 정작 낮았던 이유는 연막소독의 효과였다. 지붕보다 낮게 만들어진 굴뚝은 볏짚에 숨어있는 벌레들의 살균 소독 효과를 주기 위함이라고 하니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이런 소소한 것에서도 묻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다. 강원도 같이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집을 짓게 되면 굴뚝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굴뚝이 낮으면 오히려 불이 아궁이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온다. 이럴 경우 때에 따라서 높아질 수도 있었던 것이 굴뚝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 이불 밑에 온 가족이 발을 묻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림이 떠오른다. 이런 풍경은 온돌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온돌과 마루 구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온돌은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를 이용한 우리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마루는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게 되어 있어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집을 짓는데 함부로 지세를 깎거나 돋우지 않았으며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집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궁색스럽지 않았고 또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그런 단정한 집을 짓고 살았는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제비가 날아와 추녀 밑에 집을 짓고 함께 살았는데 요즘 제비 보기가 어렵다. 편리함에 길들여져 한옥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따스한 사람의 정마저 굳게 닫힌 아파트 문화에 묻혀 잊혀져가는 것은 또 얼마나 아쉬운 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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