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촛불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4.06.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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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슬픔의 흔적을 안고 그녀가 왔다.

희미하게 웃으며 과일 바구니를 내미는 그녀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픔을 홀로 삭이는 그녀가 꼭 나같아 아렸다. 아득한 슬픔의 심연 끝에서 그녀를 끌어올려 주고 싶었다.

“그냥 오지 이런 걸 왜 사와? 어서 들어와~.”

어제 저녁, 레몬향기 같은 그녀가 문득 그리워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 하루종일 굶었어. 마음이 아파서 아무 것도 넘길 수가 없어.”

영화를 보러 가려던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화를 다음 시간대로 미루고 죽집 문을 넘어섰다. 죽을 사들고 그녀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나와~ 집 앞이야.”

그녀의 몸이 달빛에 흔들렸다. 애써 미소 짓는 그녀에게 툭 던진다.

“먹고 힘내! 오늘은 그만 생각하고. 머릿속을 텅 비워~ 오늘은 선약이 있어. 내일 곁에 있어줄게.”

죽을 그녀 손에 쥐어주고 뒤도 안돌아보고 돌아섰다. 뒤를 돌아보면 글썽이는 그녀가 보일까봐. 내 마음도 따라서 글썽이게 될까봐.

오늘, 레몬향기 같았던 그녀가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어떻게 하냐며 눈물을 쏟아낸다. 이십년을 함께한 사람이 요즘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간단다. 누군가가 둘 사이에 있는 것 같단다. 너무 미워서 그를 지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우려하니 세상이 끝난 것 같단다. 그녀가 못해주었던 기억만 자꾸만자꾸만 떠오른단다.

아팠다. 손수건을 내밀며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펑펑 울고 있는 그녀의 붉은 얼굴이 민망할까봐 불을 끄고 촛불을 밝혔다. 촛농을 흘리며 흔들리는 불꽃, 아슬아슬하게 꺼지지 않고 방안을 비추는 촛불이 꼭 그녀 같다. 흔들흔들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폼새가 그를 지키려는 그녀가 비틀거리며 울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밤 촛불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그녀가 너무나 가녀린 그녀가 시리도록 이뻐 보였다.

문득 법구경을 떠올려 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마라. 미워하는 사람을 갖지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로우니.’ 지나친 사랑과 과도한 미움을 갖지 말라는 뜻이리라. 지나친 사랑은 집착을 낳고 지나친 미움은 증오를 낳으리니.

한참을 운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서재로 들어갔다.

“나한테 맞는 책 좀 골라줘~.”

“글쎄 뭐가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용서’라는 책을 뽑아든다. 그녀는 용서하고 싶은 것이리라. 아니 이미 용서했으리라. 그녀가 목 놓아 울면서 지키려 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행복하길. 다음에는 웃으며 촛불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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