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사항
희망사항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06.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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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며칠 선거유세로 떠들썩하던 거리가 조용하다. 교차로 한 쪽엔 당선자들의 감사인사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자동차들이 신호를 받아 꼬리 물고 지나가니 플래카드가 팽팽하게 긴장하며 일어선다. 지나던 나도 덩달아 등을 곧추세운다. 목 쉰 소리로 마음을 흔들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 열정이 모두를 위한 꿈으로 이루어지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탁한 저음에 날카롭고 낯선 음이 목에서 끼어든다. 어디 아프냐는 안부 끝에 통화는 짧게 마무리된다. 참 별일이다. 선거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내 목소리는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없다. 조금만 말이 넘친다싶으면 껄끄러운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불편하다. 원인을 알 수 없다.

한 달 전 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특별히 소리를 지르거나 목을 무리하게 쓴 일도 없다. 지인들은 큰아이가 군 입대로 훈련소에 입소한 일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말한다. 마음은 아프지만 아들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 누구에게 풀어놓을 일도 아니라 소리 내어 운적도 없다. 그런데 소리가 사라졌다.

처음엔 그저 목감기인가 하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병원에 가는 일도 지겹고 약 먹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지라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무덤덤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계획에 없던 묵언수행에 들어간 셈이다. 가장 난감한건 정해진 스케줄을 갑자기 변동할 수 없어 휴강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했다. 강의가 시작되면 목소리는 마법처럼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 믿음은 보란 듯이 깨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날따라 잘 사용하던 컴퓨터 음향기기가 말썽을 부려 준비한 동영상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어찌해야 하나. 이 난관을 어찌 극복할까. 침묵이 흘렀다. 소란스럽던 강의실이 점점 조용해졌다. 학생들이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 예기치 않았던 희한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눈빛과 손짓. 그리고 간단한 칠판 메모로 진행된 수업에서 학생들은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산만한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느라 수많은 말을 풀어놓았던 시간보다 더 몰입해 오던 눈빛들을 잊을 수 없다. 전달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정성을 기울인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덕분에 병원에 가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이 묵언수행을 즐기고 싶었다. 주위에서는 병원에 가라고 성화지만 한편으론 말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에 천천히 젖어들어 익숙해지고 있었다.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열흘이 지나자 모기만한 소리가 앵앵거리며 터지기 시작했다. 묵언의 평화로움은 사라졌다. 다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다.

가끔 말이 넘치면 자동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으로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그 열흘의 침묵이 그립다. 그리 고요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바람 일 뿐. 하는 일이 그런지라 오늘도 열심히 말을 풀다 갈라진 쇳소리가 나고서야 말을 멈추었다. 영원한 희망사항이다. 다만 말을 해야 할 때. 목소리를 내야할 때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이 되기를. 다시 맑은 소리 되찾기를 꿈꿀 뿐. 이젠 병원에 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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