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의 군인
비상구의 군인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06.0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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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해외여행을 할 때 1등석이나 비즈니스석은 엄두도 못 내니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찾게 된다. 일반석 가운데 그래도 편한 자리가 비즈니스석 바로 뒤, 승무원이 간이로 앉는 데다. 승무원과 마주 보는 것이 민망하긴 해도 공간이 넓어 오가기 쉽다. 간이 탁자를 뽑아 써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거나 일하기에는 조금 불편하고, 앞이 막혀 있어 답답하긴 해도, 옆 사람에 방해 주거나 방해받지 않아 자유롭다. 게다가 승무원이 일하는 공간과 가까워 뭘 달라기도 쉽다. 알다시피 비행기도 뒤로 갈수록 진동이 심하다.

그 자리는 여간해서 얻기 쉽지 않다. 나처럼 계획성이 없는 사람에게 그런 자리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내가 차선으로 선택하는 데가 바로 비상구 옆자리다. 의자 공간이 다른 곳보다 조금 넓기 때문이다.

그곳의 자리를 달라면 일단 지상 직원이 묻는다. “비상시 승객을 탈출시키는 의무를 지킬 수 있겠느냐?”라고. 그리고 출발 전에 승무원이 다시 묻는다. “자기를 도와 승객을 탈출시키고 맨 나중에 내리겠느냐?”라고. 비상구 옆에 앉는 사람은 문을 열고 자기가 먼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탈출시킬 임무를 부여받는 것이다. 넓은 자리를 누리는 권리와 함께 남을 도와줄 의무를 부여받는다.

국내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곳에는 미성년자를 앉히지 않는다. 항공사의 규정에는 건장한 고등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취급되는 모양이다. 나이가 되지 않아 지상에서 그 자리를 거절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주의 깊게 보니 그 자리에는 제복을 입은 군인이 주로 앉아 있었다. 휴가차 비행기를 타는 경우였다.

군사훈련도 받은 용감한 군인이 비상구를 지킨다는 것이 당연하게 비춰질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권리가 있을까? 그들이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다고 해서 민항기에서조차 ‘탈출을 위한 복무’를 해야만 하나?

이유를 대라 하면 댈 수는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주장 1: 군인은 TMO에서 할인가격으로 비행기 표를 얻었다. 따라서 돈값을 하라. 반론 1: 그렇다면 왜 일반인인 나에게는 할인해주지 않는가? 비상구 자리에 앉으면 그 대가로 할인받아야 하나?

주장 2: 군인의 군 복무는 조국과 국민을 위한 봉사다. 복무(服務)란 말 그대로 서비스를 가리킨다. 영어로 ‘밀리터리 서비스’라는 것을 중국식 한자로 바꿨을 뿐이다-이를테면 중국이니 북한의 ‘복무원 동무’를 떠올리면 된다. 따라서 군대가 아니더라도 사회에서도 군인은 그 직분이 유지된다. 반론 2: 그렇다면 민간인 가운데에서도 제대(除隊)를 한 일반병 출신이 아닌 예비역(豫備役) 장교가 그 의무를 다해야 하나? 장교는 늘 복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비’라는 말을 쓰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 자리에는 되도록 예비역을 앉혀야 하는 것 아닌가?

주장 3: 그렇다면 아이와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성도 앉히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반론 3: 그렇다면 이것은 성차별 아닌가? 승무원도 남자로 다 바꿔야 하나?

사실 허락도 받지 않고 군인을 비상구에 앉히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제주도에서 복무한 나의 학생 가운데 하나는 민항기 여승무원의 요구에 반발한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군 복무도 힘든데 비행기에서까지 꼴찌로 내리라니, 서러워도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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